10월 8일 토요일, <68,세계를 변화시킨 문화혁명>으로 세션 2의 두번째 토론을 했습니다. 68혁명은 서구사회의 문화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이지만, 그 영향력을 피상적이지 않게 다룬 저작은 찾아보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한국연구재단에서 연구과제로 선정되어 독일과 프랑스를 연구하는 관련 연구자들이 힘을 쏟은 결과,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책을 다 읽지 못했기에 토론이 더욱 반가웠습니다. 토론에서 유럽의 68과 우리의 87을 비교해보면서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논의가 계속 말해졌습니다. 자료를 정리하다보니 중앙대 김누리 교수의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정치 민주화만 됐지, 사회·경제, 문화 민주화는 전혀 안 돼 있는 '포스트 파시즘' 사회"라고 진단하고. 그는 이를 세계적 정신혁명인 '68혁명'을 우리만 비껴갔기 때문" 이라고 했는데요
프랑스와 독일에서 68로 인해 바뀌어진 사항을 알게 되면서 지금의 우리사회에서 이루어진 것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꼽아보게 되었습니다.
책을 다 읽지 못해서 토론에서 내용을 알게 되기도 했지만, 다음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보충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10월 22일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성찰>로 토론합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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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도서: <68,세계를 변화시킨 문화혁명> ■ 일시 :10.8 (토) 오전10:00 ~ 오후 1:00 ■ 장소 : 대안연 강의실(온+오프 병행) |
[1] 책 읽은 소감
▶ 당연히 번역서라고 생각했는데 국내 저자들의 책이어서 놀랐고,
읽고 나서는 현장에 있는 듯한 현장감과 탄탄한 서술에 놀랐다.
모든 대학신입생들의 필독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사회에서 68혁명 이후에 사회의 모든 문제점을 수면위로 올려서 문제를 삼은 것
지속적인 토론, 사회적 이론을 동원하며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그런 논의를 쓸데없는 일이라고 것 같아서 안타깝다.
▶혁명의 기간은 길게 잡아도 4~5개월이지만 그 영향은 매우 크다.
프랑스와 독일의 68세대들이 자신이 종사하는 영역에서 어떻게 풀어나갔느냐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 한 사회의 모순과 축적이 쌓이면 어떤 계기에 따라 혁명이 발화하게 되는데
예를들면 우리의 87과 비교한다면 사회 /경제적으로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싶기도 하다.
68혁명운동: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 경제적 민주주의가 정착된 상황에서 물질적 소비 사회 모순의 표출을 계기로 발생했으며 모든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남. 이에 비해 대한민국 1987의 가장 큰 이슈는 "독재타도 "
※ 68혁명은 현재의 유럽국가가 선진적인 시스템을 가지게 된 계기이기에
현재의 유럽/서구의 문화예술 및 서양에서 출판된 출판물을 읽는데 필수적이다.
이 출판물은 2002년~2004년동안 학술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은 연구의 결과물이다.
한국인으로서 유럽의 68전후의 맥락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설명하며
특히 문화,예술에서의 변화를 설명에 중점을 두었다.
① 한국연구재단(구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2002년 ~ 2004년
2년에 걸쳐 68운동이 불러일으킨 개별 현상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도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실과 그것이 지닌 심층적·문화적 함의를 드러내고자 노력하였다.
보고서원문링크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metaDataId=4b76f6dc12487841011248d692852026&category=Report
② DB로 구축- 동영상, 사진자료 등( 2012년 3월 ~ 2012년 8월)
68운동의 시위현장과, 역사적 배경, 사건의 전개와 결실 등과 관련된 DB 구축
68운동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http://ffr.krm.or.kr/base/td015/browse_german.html?m_srl=21088&TD=015
※ 동영상은 Adobe Flash로 되어 있는에 현재 모든 브라우저에서 실행되지 않는다.
이를 지원하는 닷지크롬 브라우저 이용하면 동영상을 볼수 있다.
https://trustall.tistory.com/40?category=1206173
[2] 68운동의 경과와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 68혁명의 경과
- 1968년 5월 프랑스 학생 운동시작
- 베트남 전쟁 반대와 열악한 대학교육의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
- 기존의 모든 질서에 대한 부정과 저항으로 이어짐
■ 프랑스, 독일에서의 결과
① 프랑스
녹색 정당의 출현, 핵발전소의 폐쇄,
주당 35시간의 노동시간, 금융·철강·국방·항공·핵산업의 국유화,
낙태에 대한 의료보험의 적용, 동성애자 차별 철폐, 사형제도의 폐지,
핵실험의 중단, 핵의 비무장화,
이민노동자들을 위한 여건의 개선, 극빈자를 위한 실업수당의 신설 등의 개량 정책 시행 )
② 독일: 본격적인 나치 역사의 청산을 시작함
“68세대의 저항은 기성세대가 역사의 진보라고 믿어왔던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의 표현이자, 부의 증대를 통해서 인간 해방을 이루려고 했던 그들의 실천 방법에 대한 부정이었던 것이다.” (p.39)
[...] 사회당이 바로 집권하지 못한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에서는 68운동 직후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오랜 숙제였던 나치의 역사를 완전히 청산한다. 드골을 계승한 풍피두 대통령 치하의 프랑스 우파 정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연정을 기반으로 집권하게 된 독일의 사민당은 보다 적극적으 로 정치·사회·교육·문화·노동 부문의 개혁을 단행한다. (p.50)
▶ 68혁명이 프랑스의 학생운동에서 시작되었지만 68세대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은
1981년에 미테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부터였기에 제도적인 변화는 늦어졌다.
이에 비해 독일에서는 68혁명 직후 사민당이 집권했기에 나치청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3] 실질적인 법적 차별의 철폐로 이어진
68운동의 여권 신장에 대한 각성에 대해
68운동 동안 여학생들은 남학생과 함께 투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언권도 없이 타자나 치고 커피를 끓이며 행사 중에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등 남녀간의 차별이 여전히 답습되고 있었다. 시위가 진행되면서 여학생들이 이러한 모순을 각성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살아가는 전통적인 여성상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열등하게 취급되는, 그래서 자신의 운명을 주도하지 못하는 수동성에 대한 거부, 여성이 남성을 섬겨야 하는 가부장적인 관계의 개선, 자녀의 양육과 가사에서 해방을 시도한 것이다.
▶1987 후에도 우리나라에 운동권내에 남녀차별이 심했으며, 운동권내에 성폭행이 공론화되지 못했었다. 학생운동을 했오 졸업후에도 운동을 하던 여자선배가 운동권내에서 성폭행을 겪은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고 끝내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매우 놀라고 슬펐었다.
-1965년 작가이자 기자인 이베트 루디가 1965년부터 미테랑과 함께 법으로 금지되어 있던 여성의 피임 권리를 위한 투쟁을 전개
- 1981년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면서 여성부를 신설했고 동지였던 루디를 장관으로 등용:텔레비전의 공익광고를 통해 피임의 원리와 방법을 적극적으로 홍보, 의료보험제도를 개선함으로써 낙태 시술의 경우에도 의료비의 70퍼센트를 환급
- [...] 여성단체를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매 맞는 여성들이 남편들로부터 피할 수 있는 여성의 쉼터를 증축했으며, 여성에 대한 올바른 표현법을 위한 지침을 마련하면서 교과서에서 여성을 폄하하거나 남녀평등에 어긋나는 표현을 삭제.
- 1983년에 루디는 남성과 여성이 직무와 관련하여 차별을 받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직업평등법’을 제정
독일의 연방헌법이 이미 1940년대 말부터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누구도 성을 이유로 차별을 받지 않고, 동등한 직무에 대해 동등한 임금을 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었으나, 1970년대 서독 노동 인구의 30퍼센트를 차지하던 여성들이 법에 명시된 바와 같은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 그 극단적인 일례가, 1970년에 한 여성 국회의원이 치마가 아닌 바지 차림으로 등원하자 남성 의원들에게서 ‘국회를 모독하는 처신’이라고 비난받은 사건이었다. 또한 당시의 민법은 주부가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남편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며, 남성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 남성들이 기피하는 직종에서 일을 했지만 남성들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남녀간의 불평등은, 1977년 민법 1356조가 “부부가 각자 가계를 꾸릴 수 있고, 주부도 직업을 가질 수 있다”로 개정된 이후에야 개선되었다. (p.58-59)
① 류호정 ‘원피스 운동화 등원’…품위 지적 수준 넘어 ‘젊은 여성의원’ 비하 2020.08.05
티켓다방이 생각난다” /여성 차별 ‘성희롱’ 댓글/“신선해” 응원 목소리도
류 의원 “그냥 흔한 옷인데…/양복·넥타이로 상징되는 50대 남성 국회 관행 깨야”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008051152001#c2b
②‘류호정 원피스 등원’으로 본 해외 ‘정치인 룩’ 논란 -美 여성의원들, “어깨 드러낸 옷 금지”에 ‘민소매 시위’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51749&code=11141100&cp=na
③ 1971년 ‘뉴욕 급진 페미니스트 강간 말하기 대회’와 ‘강간 학술 대회’
저널리스트이자 활동가였던 브라운밀러는 주디스 버틀러, 케이티 로이프, 벨 훅스와 함께 제3세대 페미니즘을 이끈 인물이다. 그는 1971년 ‘뉴욕 급진 페미니스트 강간 말하기 대회’와 ‘강간 학술 대회’를 주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들의 증언을 접했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여 강간의 역사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엔 ‘강간’과 관련한 그 어떠한 연구나 자료도 없었다. 그는 수많은 도서관과 경찰서, 군 기관, 법정 등을 찾아다녔다.
그 결과 신문 기사와 잡지, 사료, 재판 기록, 증언록, 자서전, 수기, 문학, 대중문화 텍스트와 같은 방대한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와 냉소, 위트로 자료들을 분석해냈다.
“강간은 일부 남성들이 정욕을 통제하지 못해 저지르는 범죄가 아니라,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약하고 자기방어 수단을 갖고 있지 않은 여성들을 정확히 목표로 삼아 저지르는 권력 범죄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오월의봄 |
[4] 68세대가 주도한 70년대 반핵운동과 녹색 정당의 성장에 대해
- 1973년에 발생한 석유파동을 계기로 원자력 중심의 에너지 정책으로 급선회
- 정부 주도의 핵에너지 개발 정책을 군국주의, 국익우선주의, 기술관료주의로 보고 강력하게 비판
-반핵운동은 처음에는 일상주거 공간의 개선을 요구하는 환경운동으로부터 시작됨
환경보호를 뒷전으로 밀쳐놓고 경제 성장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정부와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느낀 독일의 68세대는 녹색 정당을 결성하고 제도권 정치에 진입
반핵투쟁 과정에서 환경운동가들은 환경보호를 뒷전으로 밀쳐놓고 경제 성장만을 최우선으로 삼는 정부와 기존 정당에 대해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며, 다른 한편 기존의 운동 방식만으로는 기존 체제에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위협을 줄 수 없음을 인식하였다. 68운동에 뿌리를 둔 비제도권 진보진영은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환경정당을 결성하여 정책 형성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제도권 진입을 모색하게 되었다.(p.85-86)
▶선거제도의 문제
우리나라의 경우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자의 표를 제외한 다른 후보자들의 표는 사표가 되는 소선거구제이고 비례대표의 수가 적음
(이에 비해)
독일의 하원의원 선거제도는 혼합형 비례대표제로 정당득표율에 따라 정당별 의석을 배분하고, 단순다수대표제를 통해 결정된 지역구 당선자로 먼저 의석을 채운 다음 잔여의석을 정당명부에 따라 비례대표 의원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이는 비례성과 지역대표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제도로,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정확히 배분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아울러 소선거구제가 가지는 사표 문제를 해소하고, 전문성을 갖춘 인사들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출처] < 독일의 비례대표제도 >|작성자 이종희 교수 https://blog.naver.com/jongheesalon/221041137178
▶여야 5당 의원, ‘정치개혁법’ 초당적 발의···중대선거구제·비례대표 확대
공직선거법 개정안에는 현행 소선거구제를 4~5인 중대선거구제로 바꾸고, 비례대표 의원 수를 대폭 확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현재 253석인 지역구 국회의원을 127석으로 줄이고, 47석인 비례대표 의석은 173석으로 늘린다. 비례대표 의석은 권역별 비례대표 127석, 전국 비례대표 46석으로 구성했다. 중대선거구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쉽게 하자는 취지다.
[5]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주의 및 파시즘 비판
- 히틀러의 파시즘의 원인을 계몽안에 잠재한 도구적 이성에 있다고 보고 이성을 통한 역사의 무한한 진보라는 낙관주의를 폐기
-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파시즘을 귀결되며 권위주의적인 전통적 가정에서 성장한 인물들이 파시즘의 선동에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68운동의 지향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줌
[...] 저자들은 계몽적 사유가 자유의 신장에 기여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사유가 사회의 제도에 퇴행의 계기들을 마련해놓고 있다는 점을 밝혀낸다. 따라서 늘 이 퇴행적인 계기들에 대한 성찰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 계몽은 그 본래의 운명에 의해 압도되고 말 것이라는 경고를 결론으로 내세운다. 이성을 통한 역사의 무한한진보라는 낙관주의의 폐기를 선언한 이 책은 동시에 혁명을 통한 사회적 제 관계의 변혁이 결코 인간의 해방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관계
비판이론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파시즘으로 귀결되며 따라서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계승자라는 관점을 고수한다. 이미 1920년대 말에 세계 경제공황을 목격한 이들은 고전적 자본주의 이론이 내세우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조정은 정점에 달한 산업사회의 자본주의에는 적용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공황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이 바로 파시즘이다. 자본의 증식과 확장을 위해서는 경제의 성장이 필요하고, 노동자계층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고용의 안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국 전쟁을 필요로 하는 연결고리는 이미 히틀러의 파시즘에서 확인된다.
학생운동 세대는 이러한 메커니즘이 초래할 파국을 60년대 독일에서 재인식하게 된다. 냉전과 독일의 재무장, 그리고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권위주의적 억압은 이러한 우려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한다. 더욱이 베트남에서 확인되듯이 자본주의의 팽창 노선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고, 알제리의 해방전쟁을 프랑스는 무력으로 진압하려 들었다. 이제 전 세계적으로 파시즘이 확산되려 한다는 우려를 신좌파 지식인들이 갖게 된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파시즘 그리고 제국주의가 서로 얽혀 있다는 비판이론의 관점은 60년대 학생운동에 그대로 수용되어 이념적인 지향점으로 기능하게 된다.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 서양 문명의 핵심인 인간 이성을 정면으로 반박
-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는 별명이 붙음
- 인간 이성의 속성인 '합리성'에 주목하여 현실의 불만을 잊고 사회가 유포한 거짓 욕망에 빠져들게 하는 문화산업의 합리성에 비판을 가한다.
▶ 에리히 프롬- 개인의 내적변화를 통한 자기해방을 강조
-1923년에 정식으로 설립된 '프랑크푸르트사회조사연구소'는 초기에는 사회변혁의 주도세력으로 노동계급을 상정했지만 "산업사회의 기술적 합리화가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거세했다"고 판단하고 현대사회의 문화적 상부구조를 분석하는 것으로 연구활동의 초점을 옮긴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분석학의 도입이 요구됐다. 이에 따라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31년, 3명의 정신분석학자를 맞아들였는데 그들은 칼 란트아우어, 하인리히 멩, 그리고 에리히 프롬이었다.
[...]
-프롬은 자본주의도 소비에트식의 공산주의도 인간성을 짓밟고 관료적 사회구조를 만들어 ‘소외’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데 공통점이 있다고 봤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에 담겨 있는 사상을 더욱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었다. 프롬의 사회변혁방법론은 '개인의 내적 변화를 통한 자기 해방과 사회변혁이 동시에 추진돼야한다'는 것과 '사회변혁운동이 정치적 영역에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영역에서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http://www.redian.org/archive/13453
[6] 푸코 – 지식과 권력 관계- '일상'을 분석함
68운동의 여파 속에서 사회 전체가 푸코가 드러낸 바와 같은 사회의 권력 장치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들끓게 되면서 특히 『광기의 역사』는 가장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책으로 각광받는다. 그러면서 억압, 배제, 분리, 감금, 권력 장치 등과 같은 그의 철학적 용어들이 사회의 중심언어로 자리잡기도 한다.
실천적인 면에서 68운동이 푸코에게 미친 영향은 이 운동 직후부터 격렬한 정치 · 사회운동가로 변신한 그의 달라진 모습에서 확인된다.[...]이론적인 작업에서도 68운동은 권력과 지식의 상관성에 관한 그의 이전의 문제의식을 더욱 자신 있게 개진케 하는 촉발제가 되는데, [...]
그 결실로 나타난 대표적 저서가 바로 『감시와 처벌』(1975)과 『성의 역사Ⅰ』(1976)이다. 이 저서들과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각각 범법자, 성, 광기의 영역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관리해온 다양한 형태의 권력기술의 역사를 펼쳐 보인다. 전통적인 기존의 지식체계가 이성, 정상, 합리적인 것의 반대, 즉 반사회적인 것으로 분류하여 배제했던 영역들을 푸코는 지적인 담론의 세계로 끌어들일 뿐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인 축과 마찬가지로 문명의 산물일 뿐이라는 객관적 관점을 견지한다. 아니 오히려 역사적으로 이 영역들을 억압해온 권력과 그 배후에 있는 이성중심적 합리주의를 비판한다.
이 저서들에서 비판의 초점이 한결같이, 푸코가 분류한 바대로 고전 시대(17~18세기)와 특히 근대시기(19~20세기 중반)에 집중되는 것은, 합리적인 이성중심주의가 이 두 시대의 모든 시스템의 정신적 뿌리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정상'을 상정하면 그외의 것이 모두 '비정상'이 됨
이 저서들이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사실을 요약하면, 첫째 근대에 와서 권력행사가 확대, 심화되었다. 둘째 이러한 변화가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한 지배집단의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셋째 무엇보다 중요한 점으로 권력행사가 근대적 지식의 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푸코는 권력과 지식이 상호작용하면서 인간에 대한 지배 종속 속박의 근본적 수단이 되어왔고, 그럼으로써 근대가 외면적으로만 발전과 진보일 뿐, 실상은 억압의 모습을 한 퇴보임을 주장한다.
푸코는 근대의 해방 신화를 부정하고 비판할 뿐, 데리다와 같은 다른 해체론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의 사유 방식의 특징인 대안 없는 비판정신, 지적 저항은 기성질서에 대한 부정을 도발적 행위로 표출한 68운동의 저항정신과 연결된다. (p.190-193)
[...] 그의 지적에 의하면 지식 자체가 권력이며, 권력은 지식을 통해 작용하고, 지식은 권력을 통해 실현된다. (p.201-202)
▶ 호크하이머,아도르노 푸코
-호크하이머 <도구적 이성 비판> : 이성이 반성과 성찰을 상실하고 오직 도구적으로만 사용되게 된 결과, 이성적인 제도와 학문이 오히려 극히 비이성적인 지배와 폭력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7] 유희의 코드 (p.208-209)
[8] 마약 복용의 확산과 ‘의식의 확장(p.215-)
[9] 코뮌과 성의 해방(p.226-)
[10] 68운동 세대의 예술 및 예술가관(p.275-)
[11] 일상극(p.300-)
[12] 문학의 죽음과 언어 회의(p.347-)
[13] 새로운 주관성의 대두: “사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p.352-)
모임운영: 이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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