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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기록

01-6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

by 책이랑 2022. 7. 24.

 

목차

     

    [1] 진화론으로 이해하는 불교 : 다윈의 진화론은 연(緣起)의 진화론

     

    2021년1월호, 월간불교문화

    유선경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

     

    우리는 진화의 산물이다. 우리 조상이 지구라는 환경에 적응해 살아남아 자손을 번식하고 노화하고 사멸하고, 그 자손이 다시 환경에 적응하며 다음세대를 번식하고 노화하고 사멸하는 진화의 기나긴 역사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에 투영되어 있다. 우리가 진화의 역사다. 현재 지구에 생존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도 그들의 조상들이 이룬 거대한 진화 과정의 결과물이다.

     

    여기서 진화18세기까지 자연과학자들이 말하던 진화가 아닌, 1859년 찰스 다윈이 그의 저서 종의 기원에서 피력한 진화를 뜻한다. 다윈 이전 자연과학자들은 모든 생명체 안에 그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있어 이 본질은 변하거나 파괴되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믿음은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인 본질주의에 근거한다.

     

    본질은 모든 생명체에 내재하는 고정불변의 속성으로, 그에 따라 비슷한 생명체의 무리를 하나의 종으로 분류하고, 각각의 종은 그들 간의 차이로 자연계에서 존재하는 위치가 나누어진다고 이해했다. 생명계를 마치 똑바로 세워진 사다리와 같이 생각하며, 각각의 종에 내재하는 본질에 따라 생명체 집단이 정해진 계층에 위치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계층적 사고방식은 밑의 계층에 속하는 생명체들에 비해 그 위층의 생명체들이 고등하고 우월하다는 관점을 내포했다.

     

    라마르크를 포함한 진화론자들은 나비 애벌레 안에 나비로 자라날 목적을 본질로 가지고 있기에 나비 애벌레는 나비가 되듯이, 모든 생명체는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그 안에 본질로 가지고 있다고 이해했다. 또한 이들은 자연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이 의도적으로 고등화하려는 목적의식을 지니고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인 목적론에 기반을 둔 믿음으로, 모든 생명체들은 점점 더 복잡하게 발달하고 향상되어 우월한 종으로 진화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생명체에 내재된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해 생명체가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변형해 계층마다 향상된 형질을 가지게 되어, 결국 원시적이고 단순한 형태에서 고등하고 복잡한 형태로 향상하고 발전하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향상의 과정이 진화라고 설명했다. 이들의 진화란 최적의 완벽한 상태를 향한 향상과 발전이라는 고정된 방향성을 지닌 생명체들의 의도적 변화 과정이다. 이처럼 다윈 이전의 진화론은 보이지 않는 신의 힘에 의존하며 본질주의와 목적론에 입각한 주장이다.

     

    생명체와 환경이 상호의존하며 생성한다는 진화의 양상은 붓다의 가르침인 연기법(緣起法)을 보여준다. 연기법은 다윈의 진화론이 설명하는 생명현상을 꿰뚫는 가르침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연기의 진화론이어서생명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영원불변의 본질 또는 자성(自性)을 부정한다. 

     

     

    다윈이 피력한 진화론은 위에서 설명한 다윈 당시까지 자연과학자들의 진화론과 그 시대의 종교관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 철학사상인 목적론적 본질주의를 한꺼번에 뒤엎는 혁명적 이론이다. 다윈의 진화란 생명체에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으로 생명체 스스로 목적의식을 지니고 변화하는 향상 과정이 아니다. 고등하고 완벽한 생명체를 선택하는 자연의 의지가 담긴 선택도 아니다. 다윈의 진화란 생명체들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물리적 변이(무작위 변이)와 환경과의 상호작용(자연선택)을 통해 적응하고 살아남아 자손을 생산하고 사멸하는 지극히 순수한 물리적 변화 과정이다.

     

    다윈이 생각한 진화 과정은 우선, 굵은 줄기에서 사방팔방십방으로 불규칙하게 가지가 뻗은 나무를 연상하면 된다. 밑동에서부터 가지가 시방으로 뻗듯이, 생명체들도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유래한 여러 종들이 그들이 서식하는 환경과의 끝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생존하고 때로는 분화되어 새로운 종이 생겨나게 된다.그리고 시방으로 뻗은 가지들에서 어느 가지가 우월하고 어느 가지가 열등하다고 생각할 수 없듯이, 생명체들도 어떤 종이 다른 종들보다 고등하고 향상된 종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

     

    시방으로 뻗은 다윈의 생명의 나무를 통해, 우리는 단지 주어진 가지가 밑동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고 그리고 이 가지가 어떤 가지에서 분지되었는지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진화 과정을 거치며 어떤 생명체가 얼마나 최근에 새로 생겼고 그 생명체의 가까운 조상은 어떤 생명체였나 하는 정도이다. 이와 같이 다윈의 진화는 조상과 후손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계통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해야 한다. ‘진화는 어떤 향상이나 발전으로의 고정된 방향성이 없는 순수한 변화의 과정이다.

     

    다윈의 진화는 생명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무작위 변이로 생명체들이 변하고 또 그 생명체들에 주어진 환경과 쉼 없이 상호작용하며 생존하고 번식하며 노화하고 사멸하는 과정이다. 진화라는 자연현상은 어느 생명체도 환경의 조건과 아무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여기서 환경이란 그 환경에 사는 다른 생명체들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그들이 서식하는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의존하며 진화한다. 어느 한 생명체도 환경의 조건과 떨어져 생존하거나 진화할 수 없다.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의존 관계’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가장 중요한 논지인 자연선택을 대신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명체와 환경이 상호의존하며 생성한다는 진화의 양상은 다름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인 연기법(緣起法)을 보여준다. 연기법은 다윈의 진화론이 설명하는 생명현상을 꿰뚫는 가르침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연기의 진화론이어서 생명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영원불변의 본질 또는 자성(自性)을 부정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명체가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무작위 변이들로 인해, 그리고 개체를 둘러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변하다고 설명한다. 어느 생명체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무상(無常)한 생명체에는 변하거나 파괴되지 않고 영원히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본질(自性)이 존재할 수 없다. 본질을 가진 생명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붓다의 공()의 가르침이다. 생명체는 공하다. 그들의 집합체인 종도 끊임없이 변하기에 무상해 공하다. 그리고 그들과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자연현상인 진화도 고정된 방향성이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어서 무상하고 공할 뿐이다.

     

    다윈의 연기의 진화론은 본질의 존재에 의해 파생되는 자연에 실재한다는 절대적인 기준이나 객관적인 표준도 거부한다. 불변하는 본질의 실재가 부정되니, 즉 생명체가 공하고 진화가 공하니, 어떤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인 기준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다윈이 말하는 자연에서의 적자(適者)란 자연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강하고 최상의 적응력을 지닌 특정한 생명체란 뜻이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다른 생명체들에 비해 좀 더 나은 적응력을 보이는 생명체, 다시 말하면 국한된 환경의 조건에 따른 생명체들 간의 상대적인 개념이 다윈의 ‘적자’이다.

     

    이와 같이 1859년 다윈이 주장하고 지금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화론은 다윈이전 18세기까지 자연과학자들이 이해했던 진화가 의미하는 본질주의, 목적론, 생명체의 등급화, 생명체들의 고등화로의 방향성, 고정불변한 절대적 기준이나 법칙등 모든 전제를 부정한다. 그래서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다윈 이전까지 애용되던 “진화”라는 단어 대신에 변이에 의한 유전(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가치중립적 문구를 사용하는데, 그가 말하는 ‘진화’란 향상이나 발전이 아닌 순수한 변화의 과정이다. 환경과의 상호작용인 진화 과정은 상호의존적 생성 과정으로 붓다의 가르침인 연기이다.

     

    연기하는 진화는 어떤 의지나 고정된 방향성 없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으로 무상하고 공하다. 연기하는 진화는 무상해 공하다 .

     

    유선경 서울대학교 동물학과(현 분자생물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브라운 대학교(Brown University)에서 세포분자생물학과 박사 과정,터프츠 대학교(Tufts University)에서 철학과 석사 과정을 수학했다. 이후 듀크 대학교(DukeUniversity)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학 박사). 현재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맨케이토(Minnesota StateUniversity, Mankato) 철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는 생명과학과 철학의 만: 생명과학철학의 주요 쟁점들, 생명과학의 철학이 있다.

     

    https://www.kbpf.org/171248/생명과학으로-이해하는-불교의-이치-1-진화론으로-/

     

     


     

    [2] 교차로에서(1) 과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는가?

    http://lotus-america.org/phpbb88/viewtopic.php?f=36&t=1042 

     

    교차로에서(1) 과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는가? -My Board

    운영자들COLONlomerica, admin lomerica 전체글COLON422가입일COLON(목) 10 04, 2018 6:09 pm 교차로에서(1) 과학과 불교가 서로 대화를 나눌 이유가 있는가?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화) 11 24, 2020 4:30 pm 교차로에

    lotus-america.org

     

    마티유: 우주론에 대해 부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던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부처는 한 웅큼의 나뭇잎을 들고는 방문객에게 물었다.
    “내 손의 나뭇잎들이 더 많습니까, 숲속의 나뭇잎들이 더 많습니까?”
    “물론 숲속의 나뭇잎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나뭇잎들은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지식을 상징합니다.”
    부처는 이런 식으로 몇몇 질문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세계는 무한한, 이를테면 숲속의 나뭇잎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연구 영역을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이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그 목적에 전념하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지식들만 모으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러나 무지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실재’라고 부르는 외부 세계와 자아의 본성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경험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부처는 그러한 이해를 그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또한 우리가 현상을 지각하는 방식과 그것의 진정한 본성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 강조했고, 잘못된 지각으로 인해 해로운 결과를 강조했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끈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은 근거 없는 공포를 낳는다. 그러나 끈에 빛을 비추고 그 진정한 본질을 알자마자 두려움은 사라져버린다. 불교의 탐구는 개별적인 자아와 세계의 외적인 현상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와 ‘타자들’ 사이의 구분이 순전히 환상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불교는 실재의 진정한 상태를 ‘공(空)’ 혹은 고유한 실체의 부재라고 부른다. 가장 커다란 오류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지각하는 것에 확고부동한 실재성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확고부동한 실재라는 관념은 2,000년에 걸쳐 서구의 철학적*종교적*과학적 사유를 지배해왔다.

    투안: 그렇다. 19세기까지 고전 과학은 사물이 고유한 실체를 갖고 있으며 엄격한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발전한 양자물리학은 물질의 기본적 구성 요소가 명확하고 고유한 실체를 갖고 있다는 관념을 심각하게 뒤흔들어놓았으며, 이 세계가 엄격한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에 의혹을 제기했다.
    공의 불교적 개념은 양자역학이 보여주는 실재에 대한 개념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공의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더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는가?

    마티유: 불교에서 공이 사물의 궁극적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사물, 즉 세계의 현상들에 독자적이고 영속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를 해설한 최초의 서구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공은 결코 현상들의 부재 혹은 비존재(非存在)가 아니다.
    불교는 어떤 형태의 허무주의도 신봉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실체만 떼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비존재만 떼어 그것에 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지혜의 완성론(般若心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공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들은 고칠 수 없다고 한다.”
    왜 고칠 수 없는가? 공에 대한 명상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관념과 확고부동한 실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치유책이기는 하지만, 이 치유책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된다면 허무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혜의 완성론(般若心經)>은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존재에도 비존재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우리가 공이라고 부르는 실재의 진실한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입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하려고 한다. 불교에 따르면 사물의 본질적인 비실재성을 이해하는 것은 구도의 필수적 부분이다. 그리고 현대 과학은 이를 해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의 정신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서로를 깨우치고 서로에게 힘을 준다. 이 두 가지 지식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통을 근절하는 것이다.


    명상적인 삶이 성공했음을 나타내는 표시들은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몇 달이나 몇 년 후에 틀림없이 자신의 이기주의가 줄어있고 이타주의가 성장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착, 증오, 거만함, 질투가 예전만큼 강하다면 시간을 허비한 것이고, 길을 잘못 들어온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

     

    반대로 자연과학으로 인해 얻은 지식은 건설적이든 파괴적이든 세계에 어떤 작용을 가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자신에 대해서는 별 효과를 갖지 못한다. 과학지식은 본래 선성(善性)이나 이타주의와 결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명상과학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고통을 만들어온 근본적인 환상을 없애기 위해 마음 자체가 마음을 연구한다.

     

    [3] 주관과 객관의 양상 -(과학자와 철학자의 대담 <손바닥안의 우주>)  요약

    http://lotus-america.org/phpbb88/viewforum.php?f=36

     

    세포 유전학 분야의 과학자로 일하다가 출가해 티베트 승려가 된 프랑스인 리카르와 
    베트남 출신으로 미국 버지니아대의 천체물리학 교수가 된 투안이 이야기를 나눴다.
    눈에 보이는 것’이 곧 ‘실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분’만으로 ‘전체’를 알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과학’이 곧 ‘진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대 과학은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왔던 ‘확고부동한 실재’가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과학자들이 품을 수밖에 없는 의문들에 불교는 명쾌한 대답을 제시한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은 세계에서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이 책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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