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 토요일, 대안연구공동체 강의실에서 <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에 대한 토론을 했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참석을 못하신 분들이 계셔서 아쉬웠습니다.
워낙 '압축적'인 책이기에 책 내용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린시절, 청소년기, 부모노릇 등 나의 성장과 일상, 사회분위기를 떠올리면서 우리의 일상에 있던 근대적인 요소에 대해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가족간의 정서적 교류보다는 입시, 경제적 측면에서의 성과가 가족의 가장 큰 가치였고, 사회라기 보다는 거대한 병영이었고 등등이요.
이 책은 단순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소개하는 것 뿐만이 아니고, 서양의 모더니즘과 우리의 모더니즘의 차이, 그리고 그를 극복할 때의 입장차이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근대가 만든 '야만'을 보면서 반성을 하게 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일텐데요, 모던이 이루고자 했던 것 중에 버려야 할것, 우리가 가지고 갈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말씀을 나눈 것 같습니다. 맹목이었던 도구적 이성이 아닌 '성찰적 이성'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나누면서 토론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논제의 제목과 발제문, 그리고 네이버 열린논단의 주소로 토론을 정리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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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와 철학적 계기, 그리고 그 내용을 살피고 있는 책. 서구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차분히 성찰하고, 더 나아가 서구의 근대를 수용하고 변용시킨 우리의 탈근대가 어떠한 맥락에서 이해되는지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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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 논제 (신승환, 살림출판사, 2019, e-book)
[1] 책읽은 소감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와 철학적 계기, 내용, 서구의 근대를 수용하고 변용시킨 우리의 입장에 대해 쓴 이책에 대한 소감은?
▶어려웠다. 이해하기에는 철학적 기반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안개처럼 희미한 가운데에서도 지평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압축적이어서 한구절을 이해하려면 이전의 배경에 대해 좀더 찾아봐야 했었다.
근대로 넘어오게 되면서 무엇이 어떻게 변화한 것인지 등.
차근차근 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2018 네이버의 열린연단의 <근대성> 강의가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https://openlectures.naver.com/modernlist
[2] 68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
무엇보다도 이 혁명이 중요한 것은 여성해방이나 탈식민주의 운동 등의 문화운동으로, 나아가 철학적으로 근대의 문화 전체를 반성하는 움직임으로 전개된 데 있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니는 총체적 문화운동의 배경이 된다. 결국 이러한 움직임은 근대라 이름하는 ‘시대정신(modernity)’ 전체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진다.(p.21-22/548)
[3] 근대의 인간 이해
[...]. 근대의 이성은 더 이상 신적 이성, 존재론적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된다. [...] 이성을 지닌 개체로서의 인간은 철학의 주체이다. 그는 사유와 인식의 주체이며, 판단의 주체이다. 또한 그에 근거하여 행위의 주체로 자리하게 된다.
둘째, 이러한 주체 개념은 존재론을 넘어 실천 도덕적 주체로 이어진다. 주체로서의 개인은 행위 판단의 기준을 공동체의 원리가 아니라 자신의 자율성(autonomy)에서 찾는다. 개체 인간의 자율성과 도덕성은 실천 이성에 근거한다. 이는 개인적 주체이면서 사회적으로는 보편적 주체인 개인을 고유한 권리를 지닌 구성원으로 이해하게 한다. 또한 그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체로의 이해는 피조물 안에서의 주제, 자연 안에서의 주체란 개념으로 이어져, 고대 · 중체와는 달리 선험적 세계를 벗어난 의미에서의 인간중심주의로 형성된다. 그럼에도 이러한 중심주의는 다른 인간과 자연, 세계를 타자로 설정하는 배타적 중심주의로 작동한다.
후기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근대의 인간상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과학 · 기술이 모든 진리의 준거점이 되고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무한히 확대된 후기 근대라는 시대는 근대성이 분명히 실현된 시기이다.
따라서 이때의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이거나 완성을 향한 존재가 아닌, 계몽주의적 시민이 근대성에 의해 구현된 과학 · 기술과 자본주의의 원리를 실현하고, 그 혜택을 누리는 주체로 자신을 이해한다. 근대의 인간은 모든 존재자의 주인으로 자리한다. (p.88-89/548)
[4] 근대의 자연 이해
근대의 사유체계는 자연을 계산하고 제작하는 가능성을 지닌다. 근대정신의 원리에 따라 인간은 자연과 사물을 소유하고 장악하게 된다. 이때 자연은 이러한 처리 가능성의 대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것은 고대 철학에서 형성된 수학적 세계관이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구현됨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세계관은 자연을 결정론과 인과율에 따라 이해한다. 결국 자연 자체의 합목적성과 가치는 배제되고,인간 중심의 목적론으로 바뀌게 된다. 자연은 단지 인간 주체와 대치점에 자리하는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연장의 실체’로서의 자연은 인간에 의해 제작이 가능한 대상으로, 또한 수학과 과학적 방법으로 수량화가 간으한 객체로 환원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소유와 개발의 대상이든, 기술과 인식의 대상이든 이로부터 자연은 탈인격화하고 사물화하게 된다. 이성적 인간은 야만적 자연을 문화의 힘과 이성의 힘으로 개발하고 길들이고 인간의 필요에 따라 조작 가능한 객체로 제시한다. 이제 자연은존재론적으로 약화되기에 이르고, 주체가 배제된 자연은 마침내 자체 목적성과 자율성, 그 고유한 가치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자연에 대한 수학적이며 과학적 이해에 따라 근대의 특성인 기계론적 세계관은 물론, 산업혁명 이래 과학적 세계관이라 이름하는 체계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인간은 모든 실재를 규정하고 장악하는 중심으로 자리한다. 근대성은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과 자연, 유럽과 제3세계, 계몽된 문명과 야만,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등의 대치점에서 모든 실재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기에 이른다. 근대는 이처럼 철저한 중심부의 사고로 주변부를 소외시키는 체제이다. 이러한 이분법은 영혼과 육체, 주체와 객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였으며, 나아가 개체와 전체를 구분함으로써 중심부 이외의 것을 타자화한다. 그러기에 서구의 근대가 말하는 보편성은 결국 타자를 배제하는 차별의 보편성으로 작용할 뿐이다. (p.89-90)
▶ 고대 그리스의 두 전통
서양 과학사 전체 안에서 근대 과학의 태동 과정을 바라볼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확립된 두
가지 전통
① 수학이 학문의 모델-피타고라스에서 플라톤에 이르는 전통
② 생물학이 자연학의 모델-다른 한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확립하고 중세 스콜라철학이 받아들인 전통
▶17세기는 중세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전통이 파산하고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이 부활하는 국면
- 이 시기 과학을 주도했던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는 이 점을 분명히 의식했던 것처럼 보인다. 수학자였던 이들은 자신들이 피타고라스-플라톤 전통의 후예임을 공공연히 선언했다.
▶17세기 과학혁명은 이런 두 전통이 교체되는 사건이다. 질적 분류의 학문이 양적 측정의 학문으로 전환되는 사건, 그것이 과학혁명의 요체를 이룬다. 유기체적 자연관이 기계적 자연관으로 뒤바뀌는 사건.
-17세기에 등장한 과학자들은 원래 공학자에 가까웠고, 이들은 기계를 모델로 사물을 파악하고자 했다.
▶반면 프랑스에는 연역법의 대변자 데카르트가 있었는데, 그는 학자 전통의 관점에서 당시의 장인 전통을 수용했던 철학자다. 당시 기술자들이 품고 있던 기계론적 세계관을 형이상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은 철학자가 데카르트다.
https://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140481&rid=2937
[5] 이성과 근대의 합리성
[6] 계몽주의 근대
이로써 근대는 계몽주의 근대라 이름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근대의 정신이 전세계를 장악하게 되는 사건의 터전이 완성된다. 현대를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세 가지 사회문화 체계는 여기서 형성된다. 산업혁명과 자연과학혁명의 결과로 산출된 과학 · 기술주의, 자유로운 도시인 계층에 의해 주도된 경제체계가 구현된 자본주의, 여기에 계몽주의적 이념이 결합하여 탄생한 정치적인 민주주의는 결국 근대정신이 구체화되고 현실 안에 성취된 결과이다.
계몽주의는 또한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진보의 개념에 따라 파악한다. 초기의 진보 개념은 삶의 궁극적 완성이 이 지상에서 가능하리라는 소박한 신념에서 이루어진다. 이 개념은 서구의 직선적 시간관에 근거하여 인간 이성에 대한 순수한 믿음과 결합함으로써 계몽의 진보 관념을 낳게 된다. 진보의 관념은 사회적 진보와 경제적 진보 개념으로 발전되었다. 이것이 자본주의와 결합할 때 끊임없는 물질성장이란 신화를 낳게 된다. (p.91-92)
[7] 계몽주의 비판과 우리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이 필요한 이유
근대 계몽주의의 보편성과 동일성은 결국 일원성의 원리에 따라 다원적 세계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 차별과 억압, 보편성의 폭력은 유럽적 보편성으로 세계사를 읽는 순간 발생하는 문제이다. 유럽적 기준, 담론의 세계화는 중심주의라는 보편의 옷을 입고 세계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역기능을 발생시키게 된다.
이러한 서구의 근대는 총체적으로 우리의 철학적 원리와 규범을 파괴하였다. 유럽중심주의가 보편성이란 명분으로 위장하고 전세계에 자신의 이념을 강요한 것이 근대적 의미의 제국주의라면, 그에 따른 계몽의 원리는 타자의 세계에서는 이율배반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서구의 근대가 우리에게 끼친 폐해는 그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규범을 창출하지 못하게 가로막으면서, 여전히 우리의 삶과 정신을 그들의 원리로 지배하는 기제로 작동되는 데 있다. 서구가 강요한 제국주의와 우리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식민주의는 근대화와 서구화란 이름으로 서로 얽혀지면서 오늘날의 착종된 후기 근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서구의 근대 비판을 넘어 우리의 포스트모던적 탈근대를 논의하는 터전이 열리게된다. (p.92)
[...]
깨어진 규범을 대신해야 할 새로운 규범을 찾지 못하고 그 자리에 맹목적 자본주의를 이식하고, 그 논리에 따라서만 세계를 규정하려 한다. 산업화와 과학화를 외치는 소리는 결국 과학기술주의가 진리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시대일 뿐이다. 우리의 근대가 역사 문화적 맥락을 벗어나 착종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 문화 안에 근대 · 전근대 · 탈근대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는 말을 이러한 성찰에 근거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용할 때 그것은 의미 없는 논의에 그칠 뿐이다.
[...] 우리의 근대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에 필요한 규범과 사유의 틀을 창출하지 못하고, 서구의 근대라는 외적 기준이 내적 원리에 침입함으로써 빚어진 결과이다. 그 뒤섞인 현실과 역기능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의) 근대를 벗어나기’위한 담론에 담긴 철학적 의미이다. 따라서 탈근대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지평에서 시대의 흐름을 인식하고 문제사를 전개해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의 실재와 이야기, 우리의 역사와 삶을 담아내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사유와 이해의 틀, 인식체계를 정립하는 사유 작업이다. 그럼으로써 서구의 근대와 우리의 근대가 지니는 문제를 이중으로 극복하려는 성찰적 사유이다. 서구의 근대가 자신의 문제를 교정하기 위해 ‘성찰적 근대’로 방향잡아 간다면, 우리의 근대는 성찰적 탈근대를 지향한다.
이러한 탈근대의 원리는 다원적인 총체성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서구 근대성의 헛된 보편주의가 아닌,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올바른 원리에서 얻어낸 진정한 보편성이다. 그것은 구체적 시간과 공간에서 드러나는 개체성과 차이성의 어우러짐을 이끌어가는 길이며, 중심에의 통합을 거부하는 다원적 중심성을 의미한다. 탈근대의 사유는 유럽과 유럽의 근대성을 극복하면서, 다른 한편 우리의 철학적 사유의 틀을 생성하려는 초월적 극복의 노력이다. (p.482-483)
문광훈 교수는 먼저 계몽주의란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자 모든 개인이 “품위를 가진 성숙한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한 생성”의 정신이라고 이야기한다. 반복하여, 계몽주의 철학의 참된 유산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반성철학”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형성적 힘으로 작용하고 또 삶의 실질적인 에너지가 되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처럼 빛나는 지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 “왜 인류는 진정으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는 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야만으로 빠졌는가”를 묻는 과정을 거쳐야 했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유산을 “현대에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계몽의 자기파괴: 미신을 다스리면서 자연을 지배하고자 할 때 동일성의 원칙을 적용했으나 근대의 계몽은 신화를 파괴하면서 신화를 극복하기보다는 또 다른 형태의 신화화로 귀결되어버려 ‘계몽의 탈신화화’가 아닌 ‘계몽의 재신화화’가 발생: 이것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신화와 계몽의 변증법’이라 부름
계몽적 근대 이성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나타난 것이 ‘동일성의 원리’라고 한다면,
생활세계에서 나타난 것은 ‘획일화’가 될 것이고,
그것이 경제적 원리로 나타난 것이 ‘등가 원칙’ 혹은 ‘교환 원리’라면,
사회병리학적 차원에서 나타난 것은 ‘소외 현상’이 될 것이다.
또 근대적 획일화가 나타난 집단의 이름은 ‘익명의 대중’이 될 것이고,
문화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문화산업’ 혹은 ‘대중문화’가 될 것이며,
이 획일화를 추동한 학문적 사상적 조류는 ‘실증주의’가 될 것이다.(아도르노는 실증주의의 폐해를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나아가 파시즘은 동일성의 지배 원리가 제도화된 정치 형태가 될 것이다.
그에 대한 답으로는 다시 이성을 호명할 수밖에 없는바 그때 이성이란 “이성 자체가 아니라 반성된 이성이고 이성의 이성이어야” 하며 “계몽의 자기 배반, 말하자면 이성의 비이성적 가능성까지 경계”해야 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끝으로 개인이 “개체적 한계를 넘어서 타인으로 나아가고 공동체적 상식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새로운 이성의 가능성을 “심미적” 반성의 형태에서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제안한다.
현대적 삶은, 그것이 물질적으로 아무리 풍요롭고 정보적으로 아무리 거대하다고 하여도, 그 삶의 질적 수준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가 가진 정신의 풍경은 차라리 황량하고, 그 영혼은 증발한 지 오래인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의 계몽은 앞으로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우리는 이성을 믿으면서도 그 이성을 불신할 수밖에 없고, 계몽은 지금 여기에서 그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 나날의 경험을 부단히 질의하고 검토하면서도, 그러나 그 바탕에는 어떤 믿음 — 일관된 믿음을 아니 가질 수 없다. 나는 ‘사유의 자기갱신’, ‘이성의 자가증식’, ‘반성의 이중운동’을 떠올린다. 그렇듯이 이성의 이성 비판과 이성 초월을 생각한다. 감성과 이성의 교차를 떠올리고, 이런 교차를 통한 삶의 고양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주체는 대상을 비판하면서도 이렇게 비판하는 자기 자신도 비판해야 하고, 이렇게 비판하듯이 세계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 비판과 사랑은 모든 비루함과 저열 그리고 속됨을 넘어, 마치 에로스의 사다리처럼, 좀 더 높은 단계로 이행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경로는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의 삶을 ‘북돋는’ 것이어야 한다. 즉 즐거워야 한다. 삶은 마땅히 즐거워야 하고, 매일매일 즐거워할 만하며, 또 그렇게 즐거워해도 좋을 자격이 인간에게는, 모든 생명에게 그러하듯이, 있다.
그런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항구적 자기성찰인지도 모른다. 이 항구적 반성 속에서 우리는, 마치 ‘영구평화’나 ‘영구혁명’에서처럼, 자기 삶의 형식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부단히 갱신하고 변형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원래적으로 주어진 경험 세계의 질적 풍요로움을 회복할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반성과 실천의 부정변증법적 운동’이 될 것이다. 이러한 쇄신을 설득력 있게 지속할 수 있다면, 나와 우리는 스스로 ‘윤리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금 있는 야만과 다가오는 야만에 주의하는 것, 그리고 이 같은 야만에 저항하기 위해 삶의 도덕적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 오늘날의 계몽주의 재검토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https://openlectures.naver.com/contents?contentsId=140482&rid=2937#literature_contents
[8] 후기구조주의가 비판하는 ‘근대성’의 다섯 가지 측면
둘째, 주체에 대한 근대 철학적 이해를 해체한다. [...]
주체의 해체에 대한 철학을 푸코는 구조주의적 사고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방식에 따라 전개한다. 언어와 문화에 내재한 보편적인 구조 또는 본질이란 이념적 허구일 뿐이다. 인간은 권력의 결과물이며, 그에 따른 우연한 사회 · 역사적인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지식과 권력의 규율장치들, 넓게는 시대적 담론에 의해 구성된다. 역사의 진보가 언제나 이성의 결과물도 아니며, 그것이 직접 인간 해방과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 인간의 주체란 결국 선험적이거나 초월적 형이상학의 구성물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의미화하는 활동의 산물이다.
라캉 역시 의식을 탈중심화하여 존재와 의식의 동일성을 거부한다.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이라는 파르메니데스 이래의 동일성의 원리가 여기서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로써 니체와 프로이트를 이어 인간이란 존재는 생각과 존재가 갈등을 일으키는 분열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합목적론적 존재가 아니라 무의식적 존재이다. 의식의 우월성에 의해 특권을 누리던 인간 주체는 이제 무의식이라는 타자의 기호에 의해 자율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타자적 진술로서 소외시키고 기호화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타자일 뿐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균열과 침식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욕망과 결핍에 따라 존재를 강요당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주체의 해체, 의식적 자아의 해체는 역사 · 사회 · 문화 · 권력 · 지식 · 무의식이라는 다양한 타자적 코드에 의해 작동되기에 이른다.
셋째, 주체 이외 모든 타자를 대상으로 설정하는 사유체계를 해체한다. [...]
넷째로 문제시하는 것은 이성의 신화에 의한 진보의 이념이다[...] 그들은 역사와 문화에 보편적인 원리와 법칙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역사의 진보 역시 이성의 허구이며, 근대 인간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또한 계몽의 정신이 구현된 서양의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서양중심주의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 그들은 역사와 시간, 문화와 학문을 다원성과 차이의 생성이란 관점에서 읽어내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 안에 담긴 구조의 문제에 주목하는 구조주의적 사유체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호학적 기표와 기의의 차연, 욕망의 정치학, 몸의 담론, 소외되고 억압된 개체, 소외된 역사 등 다양한 문제들을 주제로 제기한다. [...]
마지막으로 후기구조주의는 절대 진리, 의식적 자아, 보편성의 주장을 근대성이 구현된 거대 담론으로 규정하고 이를 비판한다. 이들이 근대와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차이’와 ‘다원성’에 대한 이해이다. [...] 이것은 인간과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 결국 언어와 인간 본질에 대한 현대 철학의 관점이 포스트모던적 사유체제 안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해석된 것이다. 다원성이란 뿌리식물들의 뿌리가 땅속에서 서로 얽혀있으면서 맺어가는 관계처럼 그렇게 다양하게 형성된 문화와 사회를 말한다. 다원성은 보편적 인간 대신 개체로 존재하는 인간에게 각자에게 상응하는 존재의 원리와 자율성을 허용한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동일한 것, 전체에 얽매이지 않은 차이에 의미를 둠으로써 개인과 개체성, 부분체계들의 존재 공간을 보장한다. (p.291-294)
[9] 약한 사유의 형이상학
[10] 가로지르는 이성
[11] 새로운 신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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