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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깨달음과 역사

6장 기본불교와 대승불교

by 책이랑 2020. 11. 5.



pp.280-281실재를 전제하지 않는 연기론적 세계관을 가진 불교도가 세상을 덧없이 알고 허망하다고 하는 생각을 유지하면서도 과연 세상을 적극적이고도 뜨겁게 살 수 있는가?


여기서 냉정한 판단을 기초로 한 해답이 나왔다. 덧없다. 허망하다. 꿈같다'라는 것은 사실판단이지 가치판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가 덧없고 꿈같고 허망하다는 것은 현실이 그러하다는 사실판단의영역이며, 그것이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거나, 즐겁다거나 괴롭다거나또는 무언가를 하겠다거나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은 가치판단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상투적으로 생각하면 덧없다. 허망하다. 꿈같다' 라고 하는 면은 당연히 그만두어야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 아! 슬프다' 따위와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상관 관계를가지지 못한다. 즉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은 전혀 다른 논리적 차원의영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결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 결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마치 흰 것과 딱딱함이라는 다른 차원의 내용이 하나의 바둑돌이되는 것처럼, 세계가 허망하다는 사실판단을 전제로 하면서도 특정한가치판단인 어떤 목표를 세워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서로다른 성격의 논리적 영역이 결합하여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것이라 할 수 있다.

대승불교란 이와 같이 세계가 허망하다고 보는 사실판단을 바탕으로 하되, 자비와 원(願)'이라고 하는 투명한 가치판단을 내세워 다양한 방편바라밀을 통해 적극적이고도 뜨거운 삶을 살아갈 것을 가르친다.

예를 들어보자. 영화는 끊어진 필름의 연속동작으로 이루어지는착시현상을 통해 성립된다. 이러한 착시현상으로 이루어지는 영화는허망하며, 덧없고, 꿈같고, 환상(illusion)과 같다. 사실판단으로 보면그렇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활동사진을 허망하고 환상과 같다고하여 일찌감치 폐기처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움직이는 허망한 필름속에 인간의 꿈과 사랑, 슬픔과 용기 등을 담아내면서 영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즉 영화는 허망한 것이긴 하지만, 그 허망함 위에 뜨거움과 정열을 구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영화가 허망한 것인 줄알기에, 또한 그러기에 영화 속에 구현되는 삶의 모습들과 꿈들을 애틋하게 여기는 것이다. 대승불교도들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허망한 삶과 세계에 투명한자비와 '원'을 바탕으로 뜨거움과 적극적인 실천을 담아내고자 했다.


이러한 일은 세계를 무상, 무아, 공, 반야라고 하는 연기론적 세계관을저버리는 데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근거하기에 가능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대승불교의 미묘함이라 하겠다. 마치 활동사진의 허망과 환상이라는 속성을 통해 영화가 가능하듯이.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대승불교인 것이다.

 

pp.297~308 수행은 보살행을 닦는 것




p. 302 아무튼 불교도들의 입장에서는 무아적 연기론을 가지고도 적극적인 역사적 삶을 살 수 있는 방안이 늘 필요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래서 연기의 가르침을 꼼꼼히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무상, 무아, 연기를 통해 세상이 허망하고 덧없으며 꿈같은 줄 알았다. 이러한 이해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을 얻었다. 이것이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첫 번째 교훈이다.


그런데 세상이 연기적 (변화성, 관계성)이라는 것은 '존재들이 고정불변하는 실재(實在)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非有)'이지,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닌 것(非無]'이다.


밀접한 관계로 이어져 서로 삼투되어 있으면서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변화해 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연기를 이해한다면, 존재를 긍정적이고도 역동적으로 바라보는 적극적인 존재관을 가질 수 있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두번째 교훈이다.

이상과 같이 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두 가지 다른 의미의 교훈을이끌어내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들은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적 움직임을 통해 체계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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