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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깨달음과 역사

2장 각(覺) - 깨달음

by 책이랑 2020. 11. 2.

계명대학교 목요철학세미나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원고
깨달음에 대한 개념과 수행법, 깨달은 사람의 삶의 모습, 보살이 역사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1992년 11월 12일 제 219회 계명대학 목요철학세미나


■ 깨달음의 내용

- 끊임없이 변화하는 요소들의 가변적인 상호작용과 같은 것이 삶

- 제1원인이나  자기원인적으로 존재하는 궁극적인 실체가 없슴= 무아, 공
- 비실재의 관점(무(無)와는 관계가 없슴)

ex) 칼포퍼 "문장의 올바른 이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할 경우가 많다."라고 했습니다. 시간상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오늘 이야기와 연결하여 말씀드린다면 깨달음이란 ~이다. 공이란 ~이다' 라는 문장을 '~을 깨달음이라 한다와 '~을 공이라 한다 라는 문장으로 읽고 이해하라는 것이지요..


(즉 깨달음 또는 공이란 절대적이고도 실재적인 자기영역과 가치가 있어서 그것을 묘사 설명하는 것이 아닌, 그 어떤 상태나 사물의 속성을 약속언어로 대체하여 나타내는 문장으로 이해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어부가 문장의 앞에 있으면 그 주어의 내용이 곧잘 절대화 · 실재화 되는 오류에 빠지기 쉬우니, 주어부가 뒤에 오는 식으로 문장을 해독하면 좋겠다는 것이 포퍼의 주장입니다. 깨달음을 설명하는 데매우 유용한 이야기입니다.

 

"삼라만상 그 어디에도 실체나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상호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깨달음의 입장입니다. 그런데다시 깨달음, 공 등을 실재화시키거나 절대화시킨다면 자기모순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입장이란, 연기적인 관점에 선다.", "무아의 관점에 선다.", "공의 관점에 선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의 표현을 빌리면, 비실재(實在)의 관점에 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
 

■ 깨달음에 도달하는 방법

8정도, 37조도품(37가지 수행법), 6 바라밀
위빠사나-자신까지 포함에 삼라만상 모두의 속성과 연관성을 관찰하는 훈련
도달점-  상호연기성과 무자성을 깨닫는 것
존재의 가설적이자 잠정적인 양태를 깨닫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슴

▶ 돈오
-부분적, 선후적 태도로는 존재의 올바른 파악이 불가능함(p.115)
전혀 다른 세계에 뛰어든다.

▶"~를 깨닫는다"는 말에서 깨달음의 대상과 주체가 있다고 상정하기 쉬우나 이것은 오류임

 

▶묵조선- 생각을 지워나감

▶간화선
- 화두를 보는 참선법
- 화루란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고로 이해하거나
근접할 수 없는 무의미하면서도 가력한 느낌을 주는 단어나 개념(내용없는) (p.118)
- 생각도 안되고 말도 안되는 화두에 집중하다보면 사념과 망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을 이용하는 방법
← 내용과 형식을 모두 지우는 수행법
성(깨어있음)과 적(고요함)을 모두 아우르는 수행 방법

 

■ 깨닮은 사람의 삶

개인적으로 보살- 깨달음과 역사의 합성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깨달음의 역사화 , 역사의 깨달음화 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 그의 깨달음에 기초하는 역사로부터의자유로움만 만끽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와 교섭하고 했는데, 불교적 용어로는 '회향의식 (廻向意識)'이라고도 합니다.
적극 참여하여 그 자신을 투사시킨다

저는 이것을 '역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being and history) 에다
'역사에로의 자유(freedom to being and history)'를 겸한 삶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

 


보살은 실재의식을 떨친 열린 역사관을 바탕으로 하되, 소극적인의미에서 수동적으로 역사를 수수방관하거나 자신의 위로 흘러 지나가는 역사에 그저 자유로움만 누리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적극적이고도 열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고자 하며 그에 따라 구체적 행위를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적 행위는 과정이나 완성단계에있어서 늘 성공을 담보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다만 특정한 가치나 실재에 매몰된 사람보다 훨씬 유연하고 폭넓은세계관을 소유하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이치의 연기적 구조나 체계에 대해 투철하게 깨닫고 있다는 것일 뿐, 세부적인 디테일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판이나 실수 실패가 따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성패 여부에 관계없이 자신의 목적의식으로 일관해 나가며 매우 만족하고도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영화야말로 불교의 세계관, 특히 보살의 삶을 설명하는 데 참 적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서 아라한의 삶을 말하면서, 아라한은 삶과 역사를 연극과 영화의 필름처럼 여긴다고 했지요. 영화 즉 삶이나 역사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자유로운 태도, 얽매이지 않는태도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런데 보살은 삶이나 역사가 한낱 끊어진 필름의 연속동작임을앎에도 불구하고, 그 허구성이나 찰나적인 잠정태를 허망하다 하여 폐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필름(역사)에 꿈과 사랑과 정열을 심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스크린(screen)을 허구적인 것이라고 내팽개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유용하게 발전시키는 것처럼 말입니다.

 

비실재, 무아, 연기, 공으로 표현되는 깨달음의 세계가 소극적, 허무적, 비현실적, 비역사적으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인 역사적유희와 활동으로 전개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보살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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