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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아야 할텐데, 과거에도 그렇고 오늘날에도 평생을 수행한다고 애쓰는 스님들은 무엇 때문인가?
1) pp .324~
"당시의 사회적 통념은 우주나 자연현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상태라는 것과, 뛰어난 종교수행자는 자연, 세계, 우주에 대해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비한 능력과 탁월한 정신적 경지를 가진다고 믿고 있으며, 그래서 그에 의지하고자 하는 경향이 많았다.
당연히 수행자는 그러한 기대에 부응할 수밖에 없으며, 깨달음의 수준을 대폭 상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깨달음의 본래성격을 대폭 깨뜨리면서까지 말이다.
대폭 상승된 깨달음의 모습은 모호하게 추상적인 용어로 표현되거나,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없는 신비하고 불가지한 경지로 묘사된다.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반증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설정하는 것이다.(‘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라고 찬탄한 부처님의 태도와 대조적이다)
이렇게 되는 순간 깨달음은 엄청난 도그마가 되어 이젠 수행자도, 그 집단들도 통제 불능한 권위가 되어 천년, 이천년을 흘러가는 것이다."
최초에 연기의 가르침은 괴로움의 문제에 적용하여 그 소멸하는 방법을 말했고, 그 과정에서 12단계의 과정을 연기의 이치로서 설명했다. 그리고 신체에, 느낌에, 마음에, 법 등 다양한 존재일반에 적용하여 그 생성, 변화, 소멸하는 속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연기의 가르침은 점차 세밀해지고 다양하게 설명되어졌다. 그 까닭은 연기의 가르침의 입증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례에 대입하여 타당성을 설명해야 하는 일이 계속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시대가 흘러 후대의 제자들은 연기의 가르침을 더 다양하게 적용하여 설명했다. 존재일반을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한 75가지 존재항목에 대해 적용하기도 하고, 100가지 항목으로 확대하여 적용하기도 했다. 법계연기, 육상원융, 십현연기 등 고도로 철학화된 연기론도 생겨났다.
아마 이런 것들은 그 시대마다의 문화적 수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또는 당대의 사상적 경쟁자들과 겨루는 과정에서 보다 정치하게 다듬어진 연기론이 필요했을 것이다.(물론 이렇게 변화되고 진화된 연기론들이 구체적으로 당시의 삶의 문제들에 어떻게 적용되어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즉 연기에 대한 내용은 시대가 변하면서 그에 적용하기 위해 계속 바뀌어왔다는 것이다. 부처님 시대부터 변화하며 발전해온 연기의 가르침은 그후 1500년이 지나도록 그 변화가 이어졌고, AD 7세기쯤에 그 변화를 멈춘 것으로 보인다.(중국불교의 화엄종, 천태종, 법상종 등의 전성기를 고려한 시점임)
하지만 이 1500년간의 기간은 농경사회요, 왕권시대다. 그리고 문화적 수준은 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수준이다. 즉 연기의 가르침은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쯤에 머문 것은 아닌지 싶다.
- 오늘날 현대문명사회의 현대인이 잘 깨달으려면(이해하려면) 어떤 방법으로 노력해야 하나? 하나하나 짚어보자.
2)
- 연기성과 공성을 잘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어느 시대에나 동일한 수준의 이해인가?
3)
문제는 우리가 사유하는 내용이 길고 짧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가진 깊은 불교적 문제의식으로 그것들을 살피면서 어떻게 사유하느냐에 달렸다. 그렇다면 읽거나 검색하는 그 내용이 불서(佛書)이건, 문학서이건, 과학서나 일반적 철학서라도 불교적 문제의식으로 깊은 사유로 할 수 있으며, 기본적인 연기와 공의 생각을 현대적으로 심화시키고 확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를 훌륭하게 비춰주고 작동하는 연기론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의 시대의 여러 문제의 핵심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들어가는 연기론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다면, 깨달음도 시대마다 상황마다 사람마다 계속 만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깨달음은 완성태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깨달음과 역사>에서 ‘깨달음’과 ‘역사’가 서로 연계되어야 하지만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깨달음’은 연기를 잘 이해한다는 영역이고, ‘역사’는 방향과 내용을 선택하여 구체적으로 행위 하는 것을 말한다.
좀 전에 언급한 ‘윤리’ ‘정의’ ‘평화’ ‘공정’ ‘평화’등은 <깨달음과 역사>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역사’의 영역이다. 즉 불교에서 ‘지혜’와 대비되어 말하는 ‘자비’의 영역이다. 하지만 ‘역사’ ‘자비’의 영역이 깨달음과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 하여, 깨달음과 역사라는 이 둘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차원의 두 영역을 하나의 삶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예컨대 ‘보디(깨달음)’만 있고 ‘사트바(역사)’의 영역이 없으면 소승적 아라한일 뿐이다. 또한 보디가 없는 역사행은 범부중생의 삶일 뿐이다.
‘깨달음’이란 시공도 없는 초월적인 우주적 공간이라 비유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이 시간과 공간을 가진 삶의 영역인 지구의 대기권으로 진입한 것이 ‘역사’이다.
현응 스님- 제가 말하는 깨달음은 깨달음을 너무 높게 보지 말자. 깨달음을 하향조직화하자. 아라한의 경지는 필요 없다. 허망함을 알고, 연기성을 알고 실천하는 불교를 만들자는 의견이고, 기억과 억념, 성찰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억이 단순히 깨달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불교의 빈곤문제는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삶에, 깨달음의 내용에 관심이 없이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의 방법론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비명상을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 자비를 명상하면 자비심을 일으킨다는 것인데, 실제로 자비를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비명상도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 자비명상으로 자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불교가 빈곤하다는 것이다.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문제의식이다.
한국불교의 주류 트렌드는 자비를 실천하는 바라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모습은 그것이 잘 안 되고 있다. 깨달으면 기타를 칠 수 있다고 말하는 불교, 그런 불교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문학적 수준, 철학적 수준이 아주 뒤떨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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