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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깨달음과 역사

4장 돈오점수, 돈오돈수설 비판

by 책이랑 2020. 11. 2.

2005년 해인 승가대학 강의내용

한동안 불교계에서는 돈점 논쟁이 치열했었다. 그만큼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 방법은 선(禪)이다. 그런데 이 선수행에서 양립할 수 없는 대조적인 시각이 뒤섞여 있으며, 아직까지도 이렇다 할 방향을 잡거나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어떤 수행론이 되든지 ‘돈오점수설’과 ‘돈오돈수설’이 제기한 문제의 핵심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불교의 수행을 점검하고 확충하기 위해서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내용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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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에 대하여

돈오점수에 대한 개념이 등장한 것은 중국 당나라 불교인 선종 때였습니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하여 의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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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오는 가치관이 전환되는 현상이므로 생각의 일
돈오의 내용은 삶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서의 주체가 없다는 것이지만, 돈오가 일어났음을 아는 기능으로서의 주체는 여전히 작동
그 기능적 주체의 자아관과 세계관이 뒤집어지는 것이니 이를 돈오라고 개념화한 것


깨달음(悟)은 '나'와 세계가 망상임을 확실하게 체득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세계가 생각이 펼치는 꿈 또는 망상이라고 알게 되었음에도 허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안도가 되는 현상입니다. 만약 세계의 망상성에 대한 이해로 인하여 허무감이나 좌절감을 느낀다면, 안도감이 동반하지 못한 철학적인 정보의 추가일 뿐입니다. 이를 알음알이라고 합니다. 논리적인 이해뿐만 아니라 경험으로 알게 되는(대응하게 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므로 체득이라고 합니다.

현상계가 망상임을 체득했다는 것을 달리 설명해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나'만이 '나'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 없음'도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안도감을 통하여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안도감은 '나'에게 소유되지 않으며 '나'의 속성도 아닙니다. '나'와 무관하게 이미 가득한 그 안도감은 미지의 작용입니다. 미지는 '나'와 생각의 바깥이며 배경입니다. 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만 그 작용이 남습니다. 마치 블랙홀을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그 주변에서 빛과 중력이 왜곡되는 현상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미지가 현상계에 남기는 작용이 안도감입니다. 왜 그런지는 생각을 잠깐 멈추는 훈련을 반복해보면 누구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짠맛을 일상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타이프라이터에 검은색 종이를 끼운 뒤에 검은색 먹끈을 사용하여 문장을 쓰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검은색 종이 대신 흰색 종이를 사용해야 비로소 종이에 새겨진 글씨들이 드러나서 타이핑된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백지는 단어나 문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백지 때문에 문장의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미지는 이 백지와 같이 현상계에 작용을 합니다. 글씨로 드러난 내용들은 여러 가지 경험과 감정을 일으키지만 그 바탕인 하얀 종이는 그런 소란과 무관하게 글씨가 드러나게 하면서 스스로는 늘 여여한 것이 안도감과 같습니다.

....


깨달음(悟)이 인과 없이 문득 일어날 가능성도 있지만 생각의 이해가 동반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깨달음은 해프닝으로 그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한 깨달음은 잠을 자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잠이 스스로 덮쳐와야 잘 수 있는 것과 같아서 노력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닙니다. 깨달음은 내 모든 노력이 완전히 그쳤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바르게 깨달음이 형성되는 일련의 과정은 노력 없이 저절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깨달음 자체는 인과와 무관하지만 깨달음을 추구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노력의 과정은 지금까지 보유했던 가치관을 역류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悟)은 세계관이 뒤집어지는 것인데, 이런 의식의 전환이 벼락같이 오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과정을 꾸준히 거친 결과입니다. 사람들은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거나, 절의 종소리, 죽비 소리, 일출 장면 등을 보고 갑자기 뒤집어진다고 오해를 하지만 그런 현상은, 가랑비에 옷이 꾸준히 젖어 가다가 어느 순간에 옷이 흠뻑 젖은 것을 알게 되는 계기일 뿐입니다.

세계관이 뒤집어진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관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알게 되었다는 것은,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공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처럼 정보가 추가되는 현상이 아닙니다. 훈련을 통하여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는 현상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게(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관이란 무아와 연기입니다. 본글을 쓰는 의도를 담아서 간명하게 설명하자면 '나는 죽었다'입니다. 세계의 주인인 줄 알았던 '나'는 착각일 뿐이고 연기의 현상으로 온 세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무아와 연기를 바르게 이해하였다는 것은 '나'가 망상임을 알았음에도 심리적으로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 없음'을 '나'의 의식이 저항 없이 수용하기에 가능한 현상입니다. 이런 일은 논리적인 이해가 아니라 힘의 변화로 일어납니다. '나 없음'이 주는 안도감의 힘이 생각의 힘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을 이해하더라도 안도감의 힘이 없다면 여전히 망상 안에서 맴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도감을 키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깨달음(悟)이 일어나거나 안도감의 힘이 생각을 앞서는 일은 어떤 한순간에 홀딱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꾸준히 진행되는, 시작과 끝이 있는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슬비가 내리는 마당에 접시를 두고 빵을 하나 올려놓습니다. 빵은 서서히 젖어 들어갈 것인데, 그 빵은 어느 순간부터 비에 젖은 것일까요? 특정 기준을 정하여 판단하는 것은 그저 특정의 목적을 위한 편의일 뿐입니다. 빵에 이슬비가 처음 떨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습도 100%가 되는 과정의 어떤 시점에서도 빵은 젖은 것입니다.

돈오도 이와 같아서 어떤 상태를 기준 삼을 수 없습니다. 뒤집어진 세계관으로 확철되고 보림까지 끝난 뒤를 돈오라고 한다면 돈(頓)은 전통적인 해석인 '갑자기'라는 의미보다는 '꺾이다, 가지런히 하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도감의 힘이 조금씩 확장될 때마다 문득문득 깨달음의 여러 경계를 체득하게 되므로 그중에 특정의 경험만을 돈오라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안도감이 형성되고 무아와 연기가 선명하게 이해된, 그래서 돈오의 과정에 들어선 도반에게는 깨어났음을 스스로에게 선언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런 자기 선언이 생각의 힘을 더욱 제어하므로 그만큼 안도가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간혹 이해와 안도감의 강도가 조금 미진한 경우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이든 안도감이 충분히 증장되는 보림의 과정을 생략하기는 어려우므로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꾸 생각에 쫄게 되는 일을 방치하여 안도감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비가 그친 뒤에 젖은 빵이 다시 바람에 마르듯 깨달음의 경험도 약화되어 잊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대한 확인이나 선언을 성취의 치장 따위가 아닌 수행의 일부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후의 보림은 안도감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보림의 과정이 끝난 후에 생각이 안도감을 해치지 못하게 되고, 무아와 연기를 기반 삼은 세계관도 자기 살림(논리)을 정확하게 갖추어서 삶의 현상을 모순 없이 이해하고 설명하게 되는 것이 바로 불퇴전입니다.

이렇게 돈오를 마치면 이제 생로병사가 생각의 일임을 알아 자유롭게 됩니다. 삶의 완성을 위하여 더 이상 갈고닦거나 연습할 일이 없습니다. 더 좋은 내일 같은 것은 없으며 늘 지금 여기가 끝이어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환희심과 경외심도 그저 생각의 일이므로 구태여 좇을 필요가 없고, 조금의 불편과 치우침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시간이 저절로 해결할 것입니다. 주어지는 모든 경험들은 그저 꿈의 선물일 뿐이며 그림자가 있어야 드러나는 빛과 같습니다.

그런데 돈오를 한 뒤에도 타인과의 관계에 들어서면 돈오 이전에 몸에 밴 탐진치가 과거의 모습 그대로 작용을 하므로 당황하게 됩니다. 물론 이마저도 인과의 일이므로 안도감이나 새로운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이 현상에 영향을 받아 퇴전하는 것은 자기 이해를 스스로 세뇌하는 후공부가 미진하기 때문입니다.

탐진치는 매우 불편합니다. 꿈인 줄 알고 있으므로 막행막식을 저지르더라도 자신은 걸림이 없겠지만 곧 사회에서 고립되고 의식주의 해결이나 소통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탐진치를 일으키는 무의식은 '나'의 의식과 무관한 독립적인 심리 기계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삶의 주인공으로서의 '나'는 죽었지만 무의식에서는 그 삶의 주인공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무의식은 의식과는 다른 일처리 경로를 거칩니다. 비교 판단 선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극이나 조건화된 특정 상황에 대하여 기계적으로 대응합니다. 이런 구조적인 이유로 인하여 무의식은 의식의 지배와 명령을 받지 않습니다. 질투심과 모욕감이 일어났을 때, 의식이 상황을 합리적으로 살펴서 그런 감정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하더라도 무의식은 이 판단과 무관하게 자기 방식대로 스스로 작동합니다. 이성과 감정의 충돌이라고 표현하는 현상입니다.

깨달아 마친 사람이 무의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점수

 

입니다. 돈오의 인과로 무의식이 해결되지 않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이 뇌의 다른 영역에서 처리되기 때문입니다. 의식과 무의식은 동일하게 뇌의 신경계통에서 일어나지만 내장기관에서 간과 위의 역할이 다른 것처럼 작동하는 뇌의 부위와 역할이 상이합니다.

물론 무의식이 단순히 편향적인 심리 기계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의 기저에서 여러 감각과 개념의 바탕을 구성하고 레이더처럼 작동하며 예측과 대응을 합니다. 무의식이 작동하지 않으면 의식이 정상으로 작동하지 못하므로 인식과 대응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점수는 무의식의 제거가 아니라 고도화입니다.

무의식의 상당 부분은 '나'를 보호하는 안전장치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의식에서 삶의 주인공으로서의 '나'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은 여전히 '나'를 주인공으로 수호하는 일을 꾸준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점수는 무의식이 보호해야 할 삶의 주인공으로서의 '나'가 죽었다는 사실을 무의식이 스스로 수용하여 무의식에서도 '나'가 죽는 과정입니다.

무의식은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 형성된 것들과 청소년기에 형성된 것들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만들어진 것일수록 뇌신경에 강력하게 '배선' 되어 있으므로 변화가 어려우며 개념과 함께 형성된 것들도 의식의 힘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무의식의 형성은 스스로 조건화된 것입니다. 어린 유아는 배고픔, 벌레 물림, 배변 등의 해결을 외부에 의탁하고자 하는, 울거나 웃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고개를 젓는 등의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특정 해결책을 발견하고 그 방법을 구조화합니다.

개념이 포함된 무의식을 구축하는 경우에도 무의식이 당시의  경험사례 중에 가장 효율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스스로 채택하는 것이지 의식의 합리적인 훈련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의식에 의식적으로 접근하여 작동체계를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의식이 처음 작동체계를 구축할 때 스스로 채택한 것처럼, 무의식이 스스로 변화하도록 조건을 부여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의식이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의 대부분은 착각일 뿐인 '나'를 실체로 간주하여 지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지킬 '나'가 없음을 무의식이 스스로 알도록 계속 비춰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의식을 통제하려는, 어떤 의지나 생각을 발휘하는 경우에는 생각의 힘이 무의식에 되먹임을 하여 오히려 무의식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달리 노력하고 갈고닦을 수가 없는 이 상황에서 무의식이 하는 일을 환하게 비출 수 있도록 의식의 불이 켜져야 합니다. 무아와 연기인 줄을 다만 아는 것, 이것이 팔정도이며 그러므로 점수는 갈고닦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치료의 대부분이 결국 '나'를 강화하는 쪽으로 기획되어 있는 점이 문제
그런 방법으로는 무의식이 쉽게 변화하지도 못하며, 의식으로 무의식을 제어하려고 하면 풍선효과만 나타날 뿐 근본적으로 변화되지는 않음
중증의 정신 질환을 갖는 경우에는 '나'를 강화시켜주는 것이 효과가 있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제한적


고통의 해소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는 '나'가 없음을 훤히 깨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깨치는 일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무척 어럽거나 평생을 갈고닦아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몇 개월의 장기 상담 계획을 잡아 진행되는 정신과의 치료나 훈련보다 짧은 시간에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점수보다 돈오에 더 주력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아와 연기인줄 알면 점수는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따라오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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