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역사’에의 관심
- 불교 그 자체가 역사화되어야 한다는 뜻
그만큼 우리 불교는 이 역사와 거리를 두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 불교사를 ‘교단사’나 ‘전등사’의 차원을 넘어 ‘중생사’, ‘민중사’ 의 관점에서 정리해야 한다
- 불교는 교리적으로도 역사화될 수 있도록 역사 철학으로 전개되어야 하며, 현실적으로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사상이 구현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
▶ 민중 불교운동이나 정토구현운동은, 유보되고 왜곡된 불교의 모습을 지양하고 불교 본래의 중심적인 과제로 뛰어들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
▶ ‘중생사’의 시점에서 보면 불교사란 불국정토를 염원하는 숱한 보살들의 회원(希願)과 노력의 집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적이며 실천적인 모습에 대해 새롭고도 긍정적인 평가를 함으로써 불교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전개되는 불교인의 역사적 실천도 이러한 기존의 신앙과 실천에 접합될 때 더욱 힘있고 현실적인 움직임이 되리라 믿습니다.
▶ 불교의 신앙과 실천은 정토수행으로 대표됩니다. 배고픔과 질병과 다툼이 없이 고양된 인격을 갖춘 삶들이 사는 정토세계(淨土世界)는 고뇌와 불행에 찌들린 중생들의 안식처입니다. 그런데 정토는 이 땅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국토를 지나서 있다고도 하며 한마음 고쳐 먹는 자리가 정토라고도 합니다. 또, 이 땅을 풍족하고 쾌적하게 만들면 이 땅이 바로 정토가 된다고 합니다.
▶ 정토란 무엇을 뜻하며 어디에 있읍니까?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까? 경전에서는 “아미타불을 열 번이라도 정성껏 외우면 아무리 잘못된 바가 많더라도 극락정토에 왕생(往生, 가서 남)한다” 했으니, 아미타불은 어떠한 분이며 왕생이란 어떠한 것일까요?
▶정토수행의 요체(要諦)는 환(幻)인 중생이환의 방편을 통해 환의 세계를 깨닫는 일입니다. 서방정토든, 유심정토든, 현실정토든 그 표현만 다를 뿐 동일한 정토세계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토세계는 중생계의 실상을 깨우쳐 주기 위한 거대한 역사적 방편(幻)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각종 실재론(實在論)에 근거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불행한 현실을 구제하기 위해, 그래에 보살도 그와 똑같이 일정한 실재를 전제하여 정토를 표방하거나 바람직한 이상 사회를 설정하여 그에 다가가고자 하는 방편을 폅니다. 이런 일은 진흙을 끼얹고 물에 들어가는 행위, 타니대수(拖泥帶水)의 역사적 질곡을 자청하는 것이지만, 결코 역사에 매몰되거나 집착되어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정토 수행의 본질적 속성(幻)으로 말미암아 원천적으로 해방된 역사적 행위로 담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마경의, “여러 부처님 국토와 중생들이 공(空)한 줄 알지만, 항상 정토를 닦아서 중생들을 교화한다.” “집을 지을 적에 땅을 의지하면 마음대로 되어 장애가 없지만, 만일 허공을 의지한다면 마침내 이루지 못한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뜻에서 하신 말씀이라 여겨집니다.
▶ 사제님. 이제 정토에 왕생한다 함은 실재 의식으로 고착된 상태가 아닌, 열려진 세계관으로 역사를 수용하여 실천하는 것임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읍니다. 정토왕생을 염원하며 실천하는 보살의 삶은 역사 속에서 정토구현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토구현은 어떻게 하여야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정토왕생의 방법론은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원효스님에 의하면 “보리심을 발하여 모든 번뇌를 없애고 선한 일을 행하여 중생 모두를 제도하는 것이 기본적 요건(正因)이 되며, 이를 토대로 십념(十念), 십육관선(十六觀禪), 오념문(五念門) 등의 보조적 실천(助緣)을 곁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 기본적 요건과 보조적 실천은 아주 원형적인 모습으로 설명되고 있어서 우리 모두가 지속적으로 구체적 방법을 도출해내야 할 터이지만, 대체적으로 그 성격과 방법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보현보살의 ‘열 가지 실천적 원력(十大行願)’과 온전히 부합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읍니다. 사제님도 아다시피 그 열 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부처님께 예배함, 찬탄함, 공양함, 참회함, 남의 공덕을 기뻐함이며, 설법을 청함과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 계시기를 청함, 부처님을 본받아 배움이며, 향상 중생의 뜻에 따름이며, 모두 다 중생에게 회향함입니다.
▶ 여기서 유의할 점은, 화엄의 세계에서는 부처란 바로 무수한 중생, 국토 환경, 업보행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현보살의 실천은 무수한 부처(중생)와 무수한 부처들이 서로간에 존중하고 받들어 위하는 세계의 구현을 지향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뜻에서 “보현보살의 열가지 실천을 성취하면 마침내 극락정토에 왕생하게 된다”는 말로써 그 방대한 대승보살의 가르침을 결론지음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사제님. 신라의 원효 이후로 이 땅의 중생들은 산골 어린아이도 ‘나무아미타불’과 ‘극락정토’로써 불교를 이해하고 있으며 이는 매우 온당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심하게 ‘아미타불’을 반복하여 외우는 것보다 ‘아미타불’의 뜻이 ‘한없는 생명(無量壽)’과 ‘한없는 광명(無量光)’임을 알아야 하듯이,
▶그 드넓은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 우리의 역사적 의지를 담아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정토구현’ 이라는 명제 아래 우리는 이 중생계가 단순히 소승의 적멸주의나 수수방관하는 기계론적 인과론에 빠지지 않도록, 고달픈 중생의 삶을 희망찬 내용으로 채워야 합니다.
마침내 ‘아미타불’은 정토를 지향하는 보살들의 희망찬 이름이요, 이념이요, 구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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