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부안 내소사 지장안에서 여름 한 철
1988년 5월~10월까지 <대승회보>에 나눠서 게재됨
‘십우도를 통해 본 깨달음의 세계’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불교적 관점을 우화에 곁들여 부연하면서,
현대적 의미로 구체화 한 내용이 매우 신선하고 돋보인다.
▶공이란 존재의 부독자성 .(p. 137)
- 서로서로 겹쳐있고 영향을 주는 상태
▶유식의 식은 존재와+인식을 포함한 개념(p.141)
※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식주체로서의 '인식'이라는 표현과는 구별되는 것임.
▶공
* 존재론적 공이란 :자기 원인으로 존재(발생)하는 것이 없슴:(유기적 관련으로서 동질적 현상은 있는 것)
* 인식론적 공이란 : 사물, 상황, 현상을 대하는 데 있어서 선입견 편협한 견해의 방해 없이 열린 마음의 상태가 되는것
(p.150)
제4지식의 실재화로 말미암아 전개되는 존재양상과 무수한 경험(n)으로 부터 해방됨을 의미(p.153)
십우도를 통해 본 혁명적 깨달음의 세계
1. 소를 찾음(尋牛)
2. 자취를 발견(見跡)
3. 소를 발견(見牛)
4. 소를 얻음(得牛]
5. 소를 다스림(牧牛)
6. 소를 자유자재로 부림(騎牛歸家]
7. 사람은 남고 소만 없어짐(人存牛)
8. 사람과 소가 다 없어짐(人牛俱亡)
사람과 소가 다 없어졌다人牛俱上'는 깨달음의 세계는 이 세상을 무(無)의 상태로 빠뜨리는 것을 뜻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거꾸로 자연적 태도 속에서는 감추어져 (또는 왜곡되어) 드러나지 않는 의식과 세계 사이의 연기적 (緣起的) 관계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소가 없어짐이란 객관주의 (자연주의)나 형이상학적인 실재주의를 벗어남이고,
사람이 없어짐(亡人)이란 심리주의나 주관주의를 벗어남이다.
이는 불교의 깨달음이 사실주의나 관념주의와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곧 심리적 의식의 유혹을 떨치고 그것의 고질적 우발성과 상대주의를 극복하고(亡人),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로부터 보호받는 것(亡牛)이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경험주의로 남을 수 있음이 깨달음의 빛남이며 또한 인우구망(人牛俱亡)의 이중적 임무라 하겠다.
따라서 진정한 인우구망의 의미는 사람과 소가 실재화되지 않음이다. (사람과 소가 없어짐이 아니라)
9. 사물 그 자체로(返本還源)
한편으로 부처님의 출가 동기라고 할 수 있는, 부처님이 문제 삼은 내용도네 가지 고(苦), 여덟 가지 고(苦)로 상징되는 바로 우리 삶의 문제였고 그 해결에의 의지였다. 그리고 마침내 해결한 결론은 삶의 문제(실상)를 바로 통찰하여 올바르고도 적절하게 삶을 운용하는 일이었다. 8정도와 6바라밀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론이자 동시에 깨달은 사람의 일상생활의 준칙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은 삶과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과 결론을 성과 속, 신(神, 초월의 영역)과 인(人, 시공 속의 역사)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으로 생각하는 서구의 종교관과는 판이하다. 불교는 초월된 가치체계로서의신이나 성스러움을 도입하지 않고도, 또한 역사를 관통하는 관념적인틀로서의 절대정신이나 기(氣), 물(物) 등의 실재론 회귀할 의지처로서의 실재든, 자기 변화해 가는 실재든 을 전제하지 않고도 못 삶(衆生]의문제를 설명하고 훌륭히 살려낼 수 있는 가르침에 도달했다. 그것은삶을 연기적인, 곧 비실재론적인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혁명적 깨달음[頓悟)을 통해 도달한 세계가 엄청난 신비의 세계는 엉뚱하게 기대하고 상상했던 사람들에게 당혹감과 실망감까지 줄지도 모른다. 중생의 미망은 불법에 대한 기대조차 엉뚱했던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단호히 말한다. 우리가 도달한 세계는 사물 그 자체로라고. 마침내 불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삶의 역사를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사물 그 자체로(反本還源)'는 해방(해탈)된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불교의 논사(論師)들이 곧잘 인용하는 '얼음의 비유'는 지금의 경우를 설명하는 데 매우 적합하다. 그 비유는 갖가지 실재론에 고취되어 있어 자유롭지 못한 삶의 모습을 얼음에 비유하고 그로부터 해탈(깨달음)한 열린 삶의 모습을 물에 비유하고 있다.
갖가지 실재론에 근거한 세계관이나 방편적 차원에서 설정한 이념, 방법론에 교조적으로 얽매여 변화와 역동의 삶을 읽어 내지 못하는 삶의 태도를 얼음처럼 굳어 있는 상태에 비유함은 그렇다 치고, 깨달음의 모습이 유동적인 물이라 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깨달음의 세계가 삶의 어떤 부분도 버리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얼음과 물을 버리고 물 밖으로 나아가고자 함도 아니고물을 증발시키고자 함도 아니고 다만 굳어 있는(또는 얼어 있는) 상태를 풀어서 물 전체로 온전히 다 수용한다는 것이다.
주관적 실재론(人], 객관적 실재론(牛], 일원적 · 이원적 다원적인갖가지 실재론은 우리 삶을 얼음처럼 굳어 버리게 하여 사물을 사물자체대로 수용하지 못하게 한다.
불교의 깨달음이 비실재론적 (연기적)인 세계관에 선다는 것이 비존재, 무존재로 나아감이 아니라는 점은얼음의 비유'에서 시사하듯 명료하다
10. 역사에의 길(入垂手手)
깨달음은 모든 존재와 역사를 왜곡됨 없이 전적으로 싸안는 긍정적인 역사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인이 깨달음의 역사관을 상대주의적 역사관으로 전락시킨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경우의 상대주의적 성격은 존재에 대한 파괴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을 깔고 있으며어떠한 역사적 사실이나 현상에도 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비역사적이고 반역사적인 태도를 갖는다. 이는 또 하나의 일그러진깨달음의 모습으로서 아홉 번째 반본환원 (返本還源)의 교훈으로 잘못을 깨우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함정을 명확히 극복하고 깨달음을 올바로 체험하였다 하더라도,
깨달음은 깨달음 자체로서 그 역사적 적용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음이 명확하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존재성에 대한 깨달음이지 존재의 변혁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깨달음이란 그 어떤 것'을 어떻게 변형시키거나 쌓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어떤 것'의 그 것 자체의 존재성을 통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또는 무수한 것들의 변화와 관계성을 읽어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존재성이 공(空)임을 통찰하는 깨달음과, 역사를 어떻게꾸려 가는가의 문제는 동일 범주의 논리 적용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바둑돌의 흰 것과 딱딱함이 서로 다르면서 하나의 돌로 통일되어 있듯이
깨달음과 역사적 실천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이중적 구조인것이다.
깨달은 사람이 깨달음의 영역에 자족하지 않고 왜 역사의 길에 나서게 되는가? 존재에 대한 사랑(慈]과 연민(悲) 때문이다.... 자비야말로역사적 행위의 원동력으로서 깨달음과 역사를 묶어 내는 고리이다.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를 뛰어넘은 보살의 역사적 실천은 이 세상을 정토로 이룩할 것이다. 그렇지만 보살은 정토를 실재화시키지는 않는다. 경전에서도 언급하지만 보살은 그가 이룩하고자 하는 정토조차도 공(空)인 줄 알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살의 역사적 의지는 환상과 같은 자비 [如]'라 불린다. 환(幻)과같은 존재가 환과 같은 역사적 행위를 통하여 환과 같은 정토를 이룩한다는 뜻일까?
이제 역사의 문제에서 보살이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며 실천하는가 하는 것은 깨달음(보디)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역사(사트바)의 차원으로서의 방편과 원력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달려 있다. 방편과 원력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일 때에만 그 생명이 피어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보살은 어떠한 역사적 원력으로 무슨 방편을 펼쳐야 할 것인가?
우선 우리 모두의 삶의 형태와 상황은 어떠하며, 어떠한 문제를가지고 있으며, 그 과제는 무엇인가를 살필 일이다. 그래서 진지하면서도 뜨겁게 고뇌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역사적 성찰을 바탕으로 보살은 마침내 역사를 선택하고, 결단하고,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역사에 참을 수 없는 사랑(慈]과 연민(悲)을 기울이고 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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