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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깨달음과 역사

11월-보살만행(菩薩卍行)

by 책이랑 2020. 11. 1.

▶ 앎과 행위는 분리되거나 선후 관계가 아닌 지행합일(知行合一)

▶ 불교 역사상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노상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수준에 머문 점이 많았다 그러나 참다운 삶이란 ‘인과에 어둡지 않는 것(不昧因果)’

‘연기’나 ‘공’을  이 땅을 떠난 천국의 것으로 내몰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땅과 삶들 속에 있되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초월적인 가치 체계로 오인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깨달음은 바로 삶과 현실 역사에 대한 이해며, 존재의 변화와 관계성에 대한 통찰
- 감추어 드러나지 않는 의식과 존재의 지향적(연기) 관계를 나타낼 수 있게 되며, 의식이든 존재든 그 어떤 형태와 개념이라도 독자적인 실재가 없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침에 이른 순간 우리가 처한 역사적 제조건-우리를 울리기도 웃기기도 하는-들로부터 원천적인 해방을 얻을 수 있읍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절대적이고도 실재적인 것으로 우리를 구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즉 삶의 구조 속에서 주체로서 자각하지 못하는 피동적이고 굴절되어 있는 소외 상태를 극복함으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우리 자신을 안정과 자유 위에서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이는 각박하고도 변덕스러운 세태 앞에 놓여 있는 인간 존재에겐 더없이 훌륭한 삶의 기술입니다.  나는 이러한 자유인을 소승의 ‘아라한’이라 부릅니다.


존재의 모습은, 그것이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여전히 변화와 관계 속에 진행되는 상태로 계속 우리 앞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러한 
대상적 세계(자연·사회)에는, 잠정적이든 항구적이든, ‘실재하여 있음(有)’을 전제로 하여 조정되는 독자적인 인과 관계나 법칙성이 작용되고 있.
삶이 있어온 이래의 경험과 사실로 누적되어 그 결과들이 역사적 문제, 사회적 문제로 우리 앞에 대두되는 것

- 이러한 문제는, 불교에서는, ‘사트바(역사)’의 영역이라하여, 
단순히 ‘모든 존재가 변화와 관계로 구현되는 비실재적인 것’ 이라고 이해하는 ‘보디’의 깨달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것
‘보디’에 덧붙인 구체적인 방편바라밀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 ‘보디’ 의 깨달음으로 현실적인 경제 정책을 수립하거나 이데올로기 문제를 따진다거나 시를 짓거나 병을 치료하거나 TV수상기를 고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의 일에 맞는 제과학과 그것들의 역사적 지식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문제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법칙성이나 연관성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삶을 직시하는 기본적 시각인 ‘보디(깨달음)’와
당장 뜨겁고도 주요한 역사적 문체의 현실적 해결을 담보할 수 있는 방편바라밀인 ‘사트바’는,
각각 삶에서의 ‘기본 가치’와 ‘주요 가치’로서, 서로 나뉠 수 없는 삶의 이중적 요건

이러한 이해의 바탕 위에 설 때, 우리는 깨달음(보디)과 적절한 역사적, 사회적 실천이 서로 이상적으로 결합되는 삶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러한 삶을 일컬어 ‘보디사트바(보살)’ 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디와 사트바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실천되는 뜨거운 불꽃 같은 삶을 형상화하여 
‘보살卍행’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와 ‘~에로의 자유freedom to~’ 
전자가 ‘아라한’이고 후자가 ‘보살’의 경우

▶ ‘아라한’의 입장
- 존재를 보는 데에서는 가리움 없는 시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붉은색이나 푸른색 따위의 유리를 통해 보는 것은 존재를 바로보는 것이 아니다. 무색투명한 유리도 오히려 군더더기며 어떤 형태의 유리도 눈앞에 두지 않아야 사물을 바로볼 수 있다.

▶ 보살의 입장
그것은 기본적으로 옳은 말이긴 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시력이 약화되거나 햇빛 등의 눈부심이 있으면, 알맞은 도수의 안경이나 색안경을 쓰면 사물이 훨씬 잘 보인다. 필요에 따라 각종의 안경을 개발하여 사용함은 조금도 해롭지 않다.

즉 아라한은 유리를 제거함으로써 자유를 찾습니다 하지만 보살은 적극적으로 안경을 활용함으로써 자유로운 것입니다.
사제님. 아직도 불교 집안에서 역사를 부정시하거나 사회에 대한 관심을 비불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아라한’적 태도가 있다면, 이러한 보살적 역사관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까지는 이르렀다 치더라도, 즉 사회와 역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을 긍정하긴 하더라도, 이런 것은 불교적인 것이며 저런 것은 비불교적인 것이다, 이런 행동은 불교적이며 저런 행동은 비불교적이다하고 선을 긋는 문제가 오늘날 보살의 실천에서 중요하게 대두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주의는 불교적이니 괜찮고 ++주의는 비불교적이라 곤란하다는 따위의 태도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 말하자면, 사실은, 불교의 고유한 영역이나 가치 체계가 따로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다만 굳이 불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보디’의 영역이 그에 해당할 것입니다.

▶ 그래서 ‘사트바’의 영역인 역사상의 제문제를 불교적인 것, 비불교적인 것으로 구분하려 함은 논리적 혼돈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즉 갖가지 주의주장과 천차만별한 사회의 모습들은 ‘사트바’의 방편적 영역으로 결코 불교다, 비불교다 하는 식으로 나눌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트바’의 속성 탓으로 그속에 파생되는 갖가지 주의 주장들이 온갖 실재론에 기초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모습들이 단순히 실재론에 고착된 방편적 삶으로 전락되지 않고 원천적 해방을 담보하는 방편바라밀로서 빛날 수 있도록 ‘보디’의 열린 기본적 시각만 뒷받침된다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법륜 스님이 진행하는 정토회나 즉문즉설을 그 시작으로 보고 싶다. 중생들이 삶에 의문을 가지고 방문했을 때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고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지도(roadmap)와 구체적 행동과 방법(means and methods)을 제시하여 많은 사람을 현실의 고뇌와 불행을 극복하는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항상 자신과 사회를 공(空)의 눈으로 되돌아보고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충실한 역동적인 불자들을 만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0

 

불교평론

현응 스님의 열두 편지와 여섯 독자의 에세이* 유선경/지성훈/백경민/피터김/구기성/홍창성 이 에세이를 쓰는 인연지난여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지역에서 불교 공부를 원하는 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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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떤 주의주장도 보살의 적절한 역사적 상상력과 가설의 도입에 과감히 개방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보디’의 시각은 존재들의 ‘비실재성’을 깨닫게 해주는 기본 바탕이 되지만, 겸하여 ‘사트바’ 차원에서 보면 잠정적인 실재(有)를 인정함을 전제하더라도’ 사회 문제를 살핌에 있어서도 그가 가지고 있는 변증법적 논리 체계는 그 무엇보다 훌륭한 기초척 도구가 됨을 간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보디(깨달음)의 원천적 시각은 보살로 하여금 집착과 머무름에서 벗어나 물 흐르는 듯한 열린 자세로 두려움없이 역사 앞에 서게 해줄 것이며, 풍부한 역사적 바라밀은 희생, 헌신, 인욕을 통해 꽃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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