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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깨달음과 역사

8월- 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위하여 Ⅲ

by 책이랑 2020. 10. 27.

불교의 뼈대가 되는 변화와 관계성의 통찰은 단 존재를 바라봄에 있어 실재 의식을 떨쳐서 깨달음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 변증법적 사고를 갖게 해주어 존재들 사이의 포괄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상관 구조를 밝혀주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통시대적이고 보편적인 관찰법만 가지고는 역사적인 많은 추이와 경험, 그리고 사실의 누적 위에 전개되는 제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는 없읍니다. 역사적인 문제는 이러한 공(空)의 시각을 토대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서 각 분야 특유의 개성있는 움직임과 주변 영역과의 역사적 상관성을 읽어내야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각분야의 문제는 그 해당 분야의 역사적 노력과 그 축척에 힘입은 창의적인 발전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점이다. 즉, 예술의 문제는 미학적인 노력이나 창조적인 작가에 의해, 자연의 법칙은 자연과학적인 노력에 의해, 경제의 문제는 경제학적인 노력과 시책으로, 사회의 문제는 사회학적인 차원으로 각각 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코 불교의 깨달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깨달음 역사
- 깨달음:  일신상의 많은 능력을 갖게 된다거나 사회적 과제의 해결을 뜻하는 것은 아님

- ‘깨달음’과 ‘역사’의 문제에 대한 혼돈
-  ‘깨달음의세계’와 ‘역시에서의 변화와 발전’의 문제는 서로 다른 차원의 것
-  ‘깨달음’이란 변화와 관계성의 법칙 곧 공(空)의 시각으로 삶을 조망하는 일
- 삶과 존재들에서 실재성(實在性)의 장막을 벗겨내는 일
- 존재를 변화의 과정에 있는 가설적인 것, 환상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일

 
- 삶들의 영역이 공(변화와 관계로서의세계)임을, 비실재(무아,無我)임을, 가설적이요 환상적임을 깨닫는 일 개인의 삶에서 능력과 덕을 계발하고 확충하는 일이나 사회에서의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넓은 의미에서 통틀어 ‘역사의 영역’이라고 말한다면, 역사의 세계는 존재의 실재(reality)를 잠정적으로 또는 확정적으로 인정해 두고서 그를 바탕으로 존재의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일
그러한 것들의 비실재성을 깨닫는 일
그러한 역사의 모든 것들이 환상적임을 통찰하는 ‘깨달옴의 차원

삶이 환(幻)임을 깨달은 토대 위에서

개인이나 사회를 어떻게 건립하고 꾸미는 일
 개인과 사회의 제문제를 변화-발전시키는 ‘역사’의 차원


사회적 제문제는 그것들의 역사적 상황 속의 검증으로 도출된 방편바라밀을 통해 해결

불교의 뼈대가 되는 변화와 관계성의 통찰은 단 존재를 바라봄에 있어 실재 의식을 떨쳐서 깨달음에 르게 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 변증법적 사고를 갖게 해주어 존재들 사이의 포괄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상관 구조를 밝혀주는 데에도 도움을 주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각분야의 문제는 그 해당 분야의 역사적 노력과 그 축척에 힘입은 창의적인 발전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점임을 특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예술의 문제는 미학적인 노력이나 창조적인 작가에 의해, 자연의 법칙은 자연과학적인 노력에 의해, 경제의 문제는 경제학적인 노력과 시책으로, 사회의 문제는 사회학적인 차원으로 각각 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코 불교의 깨달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삶 일반에 두루 적용되는 변화와 관계성의 시각이 존재를 바라보는 데에서 기본이 되고 기초가 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통시대적이고 보편적인 관찰법만 가지고는 역사적인 많은 추이와 경험, 그리고 사실의 누적 위에 전개되는 제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는 없읍니다. 역사적인 문제는 이러한 공(空)의 시각을 토대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서 각 분야 특유의 개성있는 움직임과 주변 영역과의 역사적 상관성을 읽어내야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이러한 역사상의 적합한 노력들을 일러 바로 ‘방편바라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디(깨달음)의 바탕 위에 적절한 역사적 활동인 사트바로서의 ‘방편바라밀’이 결합되는 것을 조화로운 삶의 모습이라 하는 것입니다.
한편 보디(깨달음)를 결여한 많은 사람들도 그나름대로의 희로애락 속에 역사적 성패를 이루어나가겠지만, 
이 삶과 역사가 변화와 관계 속에 진행되는 환상적인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 무지로 말미암아 원천적인 괴로움의 싹을 안고서 삶을 꾸려갈 것입니다. 중생의 삶에서 괴로움의 근원은 실로 실재 관념(我相)으로 삶을 수용하기 때문이라고 이미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은 갈파하신 바 있읍니다.
 불교인에게, 특히 비구보살에게 불교인 특유의 역사적 임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역사인에게 역사적 제존재가 환상임을 상기시켜 그러한 깨달음의 토대 위에서 역사적 삶을 운용하도록 깨우쳐 주는 일이다. 사회의 여러 분야가 저마다 고유하게 독특한 역할을 가지듯이
이러한 ‘깨달음’과 ‘역사’의 조화로운 삶의 모습이야말로 열려진 보살의 역사적인 삶으로서, 그것은 환상적인 삶(보살)이 환상적인 노력(如幻慈悲)으로 환상적인 세계(淨土, 중생계)를 구현해 나가는 일과 다름없읍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살의 역사적 실천이야말로 환상으로서의 중생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며, 그것을 일러 ‘불국토청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스팔트 위의 불교인도 ‘깨달음’ 앞에 위축됨 하나없이 당당할 수 있어야겠고, 높은 산의 불교인도 ‘역사’ 앞에 떳떳이 가슴을 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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