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께 읽기/깨달음과 역사

7월- 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위하여 II

by 책이랑 2020. 10. 27.

- 깨달음이란 그를 추구하는 시간과 노력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관점을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깨달음(돈오)을
- 대상적인 어떤 세계나 경지를 터득한 주관적인 심리적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
- 깨달음을 통상적인 인식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오류
- 깨달음이란 존재와 인식의 분리할 수 없는 역동적 구조를 체득하는 일로서
- 정진적인 절차가 아닌 혁명적 전환으로 대상존재의 차원이거나 인식주관만의 차원이 아닌,
그 둘의 종합적인 세계를 맞는 일
- 앎과 행동의 선후 관계가 아닌,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체현

 



송(宋)때의 혜개스님의 “진리에 들어서는 문은 없다 大道無門.”라는 역설적 명제

말은 진리에 들어가는 ‘방법’ 이 없다는 뜻으로 어떠한 노력이나 수행도 진리의 경지에 들어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
- 해방된 마음의 상태를 진리의 경지라 한다면, 이러한 상태가 되기 이전의 노력이나 수행은 그 어떤 것에 물든 의식의 지향하는 바
인식적 차원의 얽매임이든, 존재적 차원의 얽매임이든, 두 영역이 어우러진 형태의 것이든 관계없이 실재의식의 사로잡이기에  아무리 다스려서 순수하게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재의식 위에 건립된 것인 이상 실재의식을 떠난 공의 세계와는 논리적으로 무관한 것
- 인식으로부터 해방되려는 노력이 깊이 진행되었더라도 존재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아무리 존재로부터 해방되려는 노력을 하여도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될 수 없읍니다.
- 공의 세계를 깨닫기 이전의 사유와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축적되고 정리된다 하더라도 깨달음의 세계와는 본질적 연관을 가질 수 없다는 점


- “깨달음이란 귀납법적인 결론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 “낱개의 관찰에 의한 진술 문장을 아무리 많이 모은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제한적인 일반적 진술 문장을 함축하지 않는다" (흄)
- ‘새로운 과학적 이론이나 법칙은 귀납적 인식 방법의 결과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새로운 이론에 도달하는 방법적 논리란 없다. 모든 발견은 ‘비합리적 요소’
혹은 베르그송적인 의미에서 ‘창조적 직관’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포퍼).
“순수 연역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모습을 추출해 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법칙을 탐색했지만 그런 법칙에 이르는 논리적 법칙은 없다. ‘이론은 관찰의 결과로부터 조작될 수 없고, 그것은 오직 창안될 수 있을 뿐이다”(아인슈타인)  과학철학자


노력이 깨달음의 중요한 계기
‘천차유로(千差有路 ; 어디에도 길은 있다’

 

선적인 수행에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형태의 오류
- 첫째가 ‘깨달음을 추구하려는 생각에서 빚는 갖가지 행위와 사유’ (산란)이며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체도 ‘진리’ 라든지 ‘깨달음’이라는 것에 구애된 실재관념의 소산이므로 지양되어야 하며, 

- 또 하나는 ‘어떠한 행위나 생각 그리고 노력까지도 부정하여 없애려고 하는 일종의 허무의식’(혼침)
: 한편 의식이 지향점을 잃어 아무 목적도 없이 그 의식작용마저 없애려고 하는 행위도 결국 무기력과 끝없는 어둠으로 흐를 뿐이란 점에서 배격되어야 하는 것


-

 

 

 

‘성적등지(惺寂等持 ; 깨어 있는 긴장과, 실재의식에서 해방된 상태를 균형있게 유지하는 일)’
이런 두 가지 유형의 폐단을 극복하면서 긴장과 맑음을 잃지 않는 조화로운 수행을
경험주의가 낳는 천박성과 편협성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며
또 회의주의가 낳는 비역사성 또는 반역사성으로부터도 보호되는 것


십우도(十牛圖)
‘통상적으로 점진적인 수행의 과정으로 설명
- 소를 찾아 길들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소가 소 아닌줄 깨닫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
- 이 우화의 여덟째 단계인 ‘사람과 소가 다 없어짐(人牛俱亡)’의 상태야말로 돈오, 즉 혁명적 깨달음의 단계가 되는 것

 

-  소가 사라짐은 실재화된 대상으로서의 존재개념이 사라짐이며,
사람이 사라짐은 실재화된 인식주관이 철폐됩입니다.

따라서 ‘사람과 소가 모두 없어짐’은 인식으로부터의 해방과 존재로부터의 해방을 동시적으로 성취한 ‘혁명적 깨달음’의 양상이며, 인식적 공과 존재적 공의 이중 구조의 공의 세계에 뛰어듦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야말로 비로소 미망의 역사에서 깨달음의 장으로 무대가 일전되는 것입니다. 몇 이러한 상황은 선후 절차에 따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짐이 아닌 혁명적 상황을 통한 깨달음의 장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상태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차원이 됩니다.

소를 자유자재로 훈련하여 사람과 소가 혼연일치가 되는 일곱번째까지의 노력 및 성취와,
소와 사람이 실재가 아님을 알아채는 여덟번째 단계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을 갖지못하며, 거기엔 깊은 논리적 틈이 있읍니다.



즉 깨달음 이전의 상태에서의 노력이나 행위가 깨달음의 직접적 원인이 아니라는 점
깨달음 이전의 노력과 깨달음 사이의 논리적 틈
이 점이 깨달음의 혁명적 성격을 이해하는 관건

 

- 깨달음이란 그를 추구하는 시간과 노력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관점을 새로운 차원으로 전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