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과 ‘존재’는 순수 독자 영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이루어져 가는 공동의 장이다.
돈오(頓悟)는 선종(禪宗)에서 ‘깨달음’을 지칭할 때 쓰는 말로
점진적인 절차를 통해서가 아니라 혁명적인 전환을 가지게 된다
이전의 세계관과 이후의 세계관이 전면적으로 전환되는 것을 상정한다.
‘깨달음’ = ‘공의 가르침’ 곧 ‘연기의 가르침’을 체득하는 것
이 세계를 인식의 영역과 존재의 영역을 각각 분해해 놓고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누구나 쉽게 빠질 수 밖에 없는 통념인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듯 통념이 되어 버린 가장 심각한 잘못된 사고 버릇을 떨치게 하기 위한 것
‘인식주관’과 ‘대상존재’가 별개의 독자적인 영역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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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인식에 대해 살펴보면, 1 인식은 순수한 인식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존재를 머금고 있을 때 곧 내용을 가질 때만이 인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2 그럴 때 인식은 존재 그 자체인 것이며, 존재에 의해 형성되며 규정되어 간다. |
그런 반면에 대상존재는, 1 인식되지 않은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2 존재는 인식되어진 만큼 존재한다. 3 존재는 인식에 물들어 있다. (인식에 의해 규정된다.) |
대상은 대상 그 자체로서, 인식은 인식 그 자체로서도 공한 것(변화와 관계)이지만, 대상은 인식에 있어서, 인식은 대상에 있어서 서로가 공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 구조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인식’과 ‘존재’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닌 하나의 문제 ‘공(空)’이란 표현에서는 객관적인 대상을 묘사하는 평면적인 느낌을 받는 듯하여, 좀 번거롭고 현학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나는 ‘공’에 대해 두 가지의 복합적 구성을 띤 이해를 하고 있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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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과 ‘존재’는 순수 독자 영역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며 이루어져 가는 공동의 장 |
- 심리주의: 모든 것을 ‘마음먹기에 달린 것’ 또는 ‘정신적인 면을 훈련하고 조절하면 될 것’이라는 식이어도 안되고 |
첫째는 ‘인식적 공’이란 면과 둘째는 ‘존재적 공’이란 측면입니다. |
인식의 영역을 정상화시키려면 존재의 영역을 정상화시켜야 하고, 마찬가지로 존재의 영역을 정상화시키려면 인식의 영역을 정상화시켜야 된다고 말입니다. 즉 인식의 해방과 존재의 해방은 서로가 서로의 필요 충분 조건이 되며,
따라서 인식의 문제와 존재의 문제는 선후 절차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해결되어야 하는 과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적이고도 역동적인 구조를 통찰하고 체득하는 일이야말로 바로 ‘깨달음’이며, 이 ‘깨달음’은 선후 절차에 따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맞게 되는 것으로서 점진적인 인과성을 떠난 ‘혁명적인 상황’ 입니다.
선종(禪宗)에서 ‘깨달음’을 지칭할 때 돈오(頓悟)- 필자는 혁명적 깨달음으로 번역
돈오(頓悟):
- 수행이나 깨달음을 점진적인 노력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단숨에 제거하는 지침적 선언
- ‘돈’이란 말은 기존의 관점이나 의식에서의 노력을 단련하고 훈숙(정제)한 결과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관점과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관
- 글자 그대로 ‘갑자기’, ‘순간적으로’, ‘단숨에’ 라는 시간적인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의 노력이 짧든 길든 관계없이 어떠한 점진적인 절차를 통해서가 아니라 혁명적인 전환을 가지게 된다는 뜻
- ‘돈’이란 말은 깨달음이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인식과 존재의 이중적 상관성이 동시적으로 풀리는 것
- 그 내용에서는 깨달음 이전의 세계관과 이후의 세계관이 전면적으로 전환되는 것을 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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