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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기/깨달음과 역사

9월- 돈오(頓悟), 그 혁명적 깨달음을 위하여 IV

by 책이랑 2020. 10. 27.

‘돈오점수설’은 ‘깨달음(보디)’ 과 ‘역사(사트바)’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논리적 차이를 혼동한 수행법
이제 우리의 수행론과 삶의 방식은, 일면적인 ‘돈오점수’, ‘돈오돈수’설이 아니라,
돈오(보디)와 역사(사트바)가 양면적으로 결합된 ‘보살도 구현’이어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의 영역’ 이란 어떤 것이라는 명사화된 그 것이 실재가 아님을, 변화와 관계성 속에 노정되어 있는 가설적(假)이며 환상적(幻)인 것임을 통찰하는 일

그 어떤 것이 실재가 아님을 이해하는 ‘깨달음’의 문제
 ‘ 역사의 영역’ 이란, 어떤 것을 붉은 것이다 푸른 것이다, 또는 붉게 만들어가야 한다 푸르게 만들어가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러저러하게 꾸려나가는 일의 차원이라 한다면, 

 어떤 것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내용을 담아가는가하는 ‘역사적(현상적)’ 문제는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


 ‘돈오점수설’의 요지

어린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든 기관이 갖추어 있음은 어른과 다름이 없지만 그 힘이 충실치 못하기 때문에 얼마 동안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 구실을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의 문제도 처음 삶의 본성을 깨닫고 난 뒤에도 여전히 미세한 번뇌와 버릇이 남아 있고 신통의 능력도 아직 구사할 수 없다. 그래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노력과 수행을 해야만 ‘완전한 깨달음’ 내지는 ‘최고의 성인’을 이룰 수 있다. ← but 실재성 타파에 실패한 것

(본성)을 ‘푸른 것’이나 ‘붉은 것’따위로 이해하는 차원으로 전락시킴

- 점진적 수행이란 것도 붉은 삼층집이나 2층집을 짓는 식이며 푸른 삼층집이나 푸른 2층 누각을 짓는 것과 같은 문제로 귀착
-원초적으로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결여가 발단이 되어, ‘깨달음’과 ‘역사’(현상)의 영역을 같은 차원에서 이어지는 문제로 처리하는 오류

- 역사적 차원의 문제를 깨달음의 연장선에 있는 문제로 이해하여 외적인 능력과 공용(功用)의 성취를 깨달음의 확충과 완결로 잘못 이해하였다는 것

‘번뇌를 끊어 마침내 해탈에 이른다’는 말은 심리 현상이나 번뇌 자체가 없어지거나 액면 그대로 그것을 제거하는 것을 뜻함이 아닙니다.(그렇게 되면 바위나 나무와 같이 되어버리는 것) 

- 이 말의 본뜻은 심리 현상과 외적 작용은 여일하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자세가 ‘실재 의식’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마치 윤회에서 벗어난다(또는 윤회를 끊는다)는 말도 윤회 현상(생멸 현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 생멸심(생사심) 곧 실재 의식을 떨치고 생멸 현상을 수용하는 것이란 점과 같은 이치지요.


실제(實際)의 이지(理地)에선 한 띠끌도 용납하지 않지만 만행문(萬行門)에선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

삶(존재)을 깨달음의 눈으로 비춰 보면 그 어떤 실재(reality)도 성립할 수 없지만,
역사적 차원에서는 환과 같은 방편바라밀을 구사하여 다함 없는 법계를 장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보디사트바(깨달음+역사)’ 라는 각성되어 있는 풍부한 삶의 전형으로 표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수행론과 삶의 방식은, 일면적인 ‘돈오점수’, ‘돈오돈수’설이 아니라,

돈오(보디)와 역사(사트바)가 양면적으로 결합된 ‘보살도 구현’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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