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함께 읽기/깨달음과 역사

3월- 확연무성(廓然無聖)

by 책이랑 2020. 10. 27.

 불교는 삶이나 역사(시간, 공간)를 초월한 그 어떤 영역(성스러운 것) 도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함
- 삶이나 역사의 갖가지 문제는 자체의 속성을 잘 통찰함으로써 올바른 해결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 불교 용어-  삶의 문제를 공정하고도 객관적으로 살피기 위해 창출된 논리적 언어
고착화 되고 전도되며 심하게는 절대화되는 경향이 있다.
‘부처’ ‘깨달음’, ‘진리(法)’라는 말까지도 절대화시키거나 신비화시키면 안된다.

‘무엇이 으뜸가는 성스러운 진리입니까?’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에
달마 스님은 ‘성스러운 진리 같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廓然無聖)’라고 대답.
- 이 세상을 일사불란하게 설명하고 이루어 나가는 가치 체제로서의 ‘그 어떤 진리’, 이를테면 불교에서는 다른 사상에서 볼 수 없는, 이 세상을 가장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그 어떤 ‘법’이 있는 듯이 생각하는 것은 오류
- 그러한 법은 없으며 그러한 가치 체계로서의 진리도 없다

▶ but 어떤 ‘법’을 추구하는 감정은 대단히 뿌리깊은 미망에 근거해 있다.
-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이러한 생각을 아주 오래 전 원시인 시절부터 인간들이 가졌던 의식구조라고 말하고 있지요. 곧, 사람들은 일회적이고도 단면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행위(俗의 영역)는 초월적이고도 성스러운 원형적인 영역(聖의 영역)을 상정하는 경향이 였슴. (역사의 무의미성에서 벗어나 영원성을 얻을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역사의 흐름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도의 잘못된 해석마음이나 성품, 욕망 따위로 비유된 상징적인 ‘소’를 찾아 여러 단계의 훈련 과정을 거쳐 순화 정제하여 완전히 길들이는 것

 그러나 바른 해석은 ‘소가 소 아닌 줄깨닫는 이야기’
- 그 소가 사실은 실체가 없음을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도를 성취
대상으로서의 ‘소도, 찾는 주체로서의 소년 자신도 모두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일,

▶ 불교는 삶이나 역사(시간, 공간)를 초월한 그 어떤 영역도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함
- 삶이나 역사의 갖가지 문제는 자체의 속성을 잘 통찰함으로써 올바른 해결을 구할 수 있는 것이지 삶의 무대 밖에서 신이나 성스러운 영역을 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삶과 역사 밖의 성스러운 영역이나 가치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의 인식은 종교적 인식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 역사 속에서도 절대적이고도 온전한 진리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적이고도 과학적인 인식이라 할 수 있읍니다.


불교도의 역사관은 역사속에서 미완의 상태로 불교도에 의해 실천되고 검증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 부처님도 ‘이러한 가르침(성스러운 진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을 듣고도 놀라거나 불안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희유한 일일 것’이라 함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설정하지 않고서도 병폐 없이 역사의 삶을 꾸려가는 일
- 구체적 방편바라밀(구체적인 역사적 방법론과 행위)에 이르는 논리적인 통로가 있는 것은 아닙
변화해 나가는 역사의 모든 상황과 실상을 통찰하고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과 소신있는 실천적 노력(보살행)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

▶ 그러나 현재 우리는 안경조차 없는 열려진 시각은 고사하고 온갖 빛깔이 겹치고 또 겹쳐 검게 된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붉은 빛의 막을 벗겨내고, 푸른빛을 벗겨내고, 차례로 빛깔을 하나하나 벗겨내어 무색투명한 안경을 만들고 난 뒤에 비로소 안경을 벗어던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단숨에 벗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 무엇인가를 찾아 행각 길에 나선 사제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옛 선사의 시 한편을 부칩니다.

존재의 속성을 알아 생활하고(任性逍遙)
세상의 관계를 살펴 실천하라(隨緣放曠)
다만 잘못된 생각만 거두면 될 것을(但盡凡情)
무슨 성스러운 진리(법)를 따로 구하랴(別無聖觲)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