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은 윤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함으로써 답을 준다.
불교는 세계의 원리로 윤회가 아닌 연기(緣起)를 말한다.
이 세상은 윤회하는 주체가 없는 끝없이 이어지는 변화의 연속(불꽃)이다.
윤회의 실상 그대로를 온전하게 수용하고
창조적인 의지로서 역사의 변화를 통찰 활용할 것을 말한다.
고대인도 윤회 | 불교 (緣起) |
윤회 - “생명은 한번 죽음으로써 그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며 끝없는 재생을 하게 된다” - 고대 인도의 종교 사상, B.C.6세기쯤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사상 |
- 연기(緣起)의 가르침:‘변화와 관계성의 법칙’ 개체를 불인정 하므로 윤회는 성립되지 않음, 변화와 관계임. - 독자적이고도 불변하는 실재성(實在性)을 인정하지 않음 관계와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존재 양태이므로 개체적 삶의 동질성을 계속해 가는 ‘나(我)’라는 것은 성립불가능 ( 기존의 윤회 사상을 적극적이면서도 새로운 의미로 수용한 것) - ‘나’라는 주체에 얽매이지 않고도 부단한 경험과 실천을 이룰 수 있슴 (도덕적인 인과율과 과학적인 인과율에도 부합하는 삶의 길) |
삶이란 괴로움의 나날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삶도 그러하지만 그 어떤 형태의 재생도 바람직하게 느껴지지 않으므로 현재의 삶도 되도록 원만히 마감하고 더이상의 재생도 원하지 않게 된 것 |
괴로움의 이유는 존재가 항상 지속되기를 바라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 - 밤새도록 타는 불꽃과 같이, (윤회의 주체가 없으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변화의 연속임 but 주체가 없다 하여 인과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님 - 벼의 씨앗이 비와 햇볕과 물로 인해 싹으로, 꽃으로, 열매로 되면서 다른 이름,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지만 일정한 인과의 동질성을 갖는다. |
→ 고행이나 제사, 기도와 같은 특수한 종교적 수행을 통해 해탈(모크샤)을 성취하는 것이 목표 | → 윤회의 실상 그대로를 온전하게 수용하는 것 (수행에 대한 오해: 수행의 핵심은 각종 행위나 심리 상태를 종식시키고 축소시키는 것이 아님) 불교에서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번뇌는 바로 ‘나’라는 실재 의식 - 창조적인 의지로서 역사의 변화를 통찰, 활용 |
" 첫째로 팀의 해체가 섭섭하기는 하지만 그토록 비극적 사건은 아니다. 다섯 선수가 함께 뛰지는 못하겠지만 그것이 모든 것의 종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음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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