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페란테: 방대한 반서사(시)의 거장
Elena Ferrante: Master of the Epic Anti-Epic
버지니아 울프적 열쇠(해결책)를 가진 단테
Aaron Bady
2015년 9월 2일
원문: https://lithub.com/elena-ferrante-master-of-the-epic-anti-epic/
마침내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이 모두 영어로 번역되어, 앵글로 색슨문화권의 독자들은 이제 그 작품 전체를 흡수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1,700페이지가 한 작품을 구성하는 네권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그 책들을 각각 분리된 소설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페란테는 최근 베니티 페어지와의 인터뷰" 에서 말했다. " 4권의 책으로 나왔지만, 나폴리 소설은 이야기가 빽빽하게 들어 있는, 매우 긴 한편의 소설입니다."
이탈리아어 제목을 살펴보면, 작가가 말한 이런 구성원칙은 더 명확하다 <눈부신 나의 친구>로 번역된 첫번째 소설은 첫권의 제목일 뿐 아니라 페란테가 쓴 "매우 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제목이기도 하다. 그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stories,이야기들이 있다. Storia del nuovo cognomen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는 나의 눈부신 친구의 제 2권이고 “volume secondo 2권” 이고 Storia di chi fugge e di chi resta ([Story of]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의 [이야기] 는 나의 눈부신 친구의 세번째 권이고 Storia della bambina perduta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세번째권과 네번째 책이다. 하지만 첫번째 책은 두개의 "이야기"로 나뉘어 져 있다. 서문 이후 " 어린 시절"은 "돈 아킬레의 이야기"이고 그 후에 "신발 이야기"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 작품은 4개의 시리즈가 아니다; 그것은 매우 긴 하나의 소설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라는 제목 아래 5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1개의 소설이다.)
4권이 4년에 걸쳐 출간되었고, 즉 각권마다 1년씩의 지연을 두고 번역되었기에 독자들은 지금까지는 큰 그림을 보기가 어려웠다. 페란테의 " 긴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항상 하나의 통일된 작품으로 생각되어지긴 했지만, 그건 작가의 머리속에(만)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통합이었다. 그동안 독자들은 주인공인 엘레나 그레코가 어릴 때부터 여성이 될 때까지 이야기—순간적인 드라마 속에서 살거나, 나폴리의 작은 동네에서 자신을 잃거나, 두 여인의 낭만적 운명의 우여곡절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을 다룬 4권의 소설 중 1권, 2권, 3권을 쉽게 읽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 책들이 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혹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확신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책들은 삶과 사랑에 대한 끝이 안보이는 탐험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는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끝인 4권이 나왔다.)
나폴리 4부작이 다양한 장르에서 장점을 빌려오고, 직접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들, 특히 여성과 관련된 것들과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비교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이코노미스트>지 는 이 책들을 " 기막히게 좋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멜로 드라마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그녀의 작품은 명예, 배신, 범죄에 관한 일종의 과장된 뮤지컬 멜로 드라마라고 불리는 나폴리 연극 전통을 연상시킨다. 페런트 여사는 21세기 디킨스로 등장했고 독자들은 그 다음 편을 구입하기 위해 서점에 몰려들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매력적인 평가이지만 동시에 매우 피상적인 비교이다. 그러나 이렇게 평가를 하는 건 <이코노미스트>지 뿐만은 아니다. 디킨스의 소설은 아주 아주 길고, 엘레나 페런트의 나폴리 소설 또한 아주 길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끝나지 않고) 계속될 수 있는 드라마만큼 자유롭지 않지만, 이 비교에서 페란테의 작품이 어떤 측면에서 디킨스의 작품과 유사하다고 말하는지 알아 차릴 수 있다. 연극적 캐릭터, 두서 없는 줄거리를 이탈리아식으로 트위스트한 ,"명예, 배신, 그리고 범죄" 가 많이 나온다는 뜻이다. 이런 책들의 매력은 탁월한 재미이다. 이 책들의 매력은 표면적으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이라기 보다는 끝내주는 좋은 이야기라는 뜻으로 우리가 가게에 가서 급하게 살 때 고르게 되는 그런 책들이라는 뜻이다.
그런 책들의 내용이 성차별적이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한 여자가 다른 여성의 삶에 써내려간 긴 이야기가 멜로 드라마적인 TV연속극와 비교되거나, 과장된 연극적 속성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인기 있다는 프레임으로 설명되는 것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여성 작가들과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읽은 여성들에 관해 설명하는 오래된 방식이다. 남자들은 진지한 문학 작품을 쓴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조나단 프랜젠이 " 위대한 미국 소설"을 썼는지 아닌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여성 작자들의 작품은 값싼 소비재로 간주되는데, 재미가 있을 수 있지만, 결국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식의 평가를 통해 여성작가들과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독자 모두가 조롱당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오페라적인데, 주부들에게 파는 것으므로 soap opera- 즉 하찮은 TV연속극이라는 것이다. 그런 연속극들은 소비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만들 뿐이다.
<이코노미스트>지가 한 것과 같은 종류의 논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지는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일 페란테가 이런 식으로 평가 된다면, 그것은 독자들이 자기 자신들이 왜 페란테의 작품을 찾는 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독자들이 엘레나 페란테의 작품에서 뭔가를 찾았다고 확신하고, 더 이상 찾을 생각도 안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매력적인 평가이지만 매우 피상적인 비교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를 하는 건<이코노미스트>지 뿐만은 아니다. 디킨스의 소설은 아주 아주 길고, 엘레나 페런트의 나폴리 소설 또한 아주 길다. 이론적으로는 끝없이 계속될 수 있는 TV드라마만큼 자유롭지 않지만, 이런 비교를 통해서 이 작품이 어떤 측면에서 디킨스의 작품과 유사하다고 말하고 싶어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건 연극적 캐릭터와 두서 없는 줄거리를 이탈리아식으로 비튼 ,"명예, 배신, 그리고 범죄"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얼른 봐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술이라기 보다는 끝내주는 좋은 이야기라는 것으로 우리가 가게에 가서 급하게 살 때(에도) 선택 되는 그런 책들이라는 뜻이다.
그런 책들의 내용이 성차별적이라는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한 여자가 다른 여성의 삶에 써내려간 긴 이야기가 멜로 드라마적인 TV연속극와 비교되거나, 과장된 연극적 속성 때문에 소비자들에게 인기 있다는 프레임으로 설명되는 것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런 건 여성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읽은 여성들에 관해 설명하는 오래된 방식이다. 남자들은 진지한 문학 작품을 쓴다.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조나선 프랜즌이 " 위대한 미국 소설"을 썼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여성 작자들의 작품은 값싼 소비재로 간주되는데, 재미 있을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식의 평가를 통해 (여성)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읽는) 독자 모두 조롱당한다. 이 작품은 오페라적인데, 주부들이 사는 것이라서 soap opera- 즉 하찮은 TV연속극이라는 것이다. 그런 연속극들은 소비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만들 뿐이다.
페란테가 쓴 이 소설들은 멜로 드라마 같은 소설들이 아니다. 페란테의 작품에서 우리는 멜로드라마에 있는 과장된 인물들, 거친 줄거리들, 충격적인 선정 주의 대신 비극적인 결함들과 사소한 노블리티를 가지고 있는 인간존재들에 대한 민감하도도 현실적인 서술을 만난다. 멜로 드라마가 흑백의 세계관에서 쓰여지는 것이라면 페런트의 세계관은 모두 회색이다. 드라마나 디킨스가 긴 이야기에서 필요할 때마다 새로운 등장 인물과 새로운 줄거리를 소개하고, 등장 인물들을 끌어 낸다고 말한다면 페란테는 긴 이야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등장 인물, 동일한 주제, 그리고 같은 줄거리로 진행된다.
사람들이 Ferrante의 작품을 "epic서사시"라고 할 때, 그들은 그것이 매우 길지만 훌륭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이 맥락에서 에픽은 "grand"와 같은 형용사와 같은 의미이다(크고 훌륭하다는 뜻). 이 작품은 서사시적인 영역이나 혹은 서사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페란테의 작품은 나폴리의 작은 마을에 사는 두 친구에게 초점을 맞춘 것일 수도 있지만, 지구의 이 작은 구석을 통해 전 세계를 보여 주려는 원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그리스 고전문학 전공자가 무언가를 "epic"이라고 칭하고, 작가가 고전을 공부했다는 것을 알고- epic이라고 한다면 이 말은 이탈리아에 대한 존중을 담아서, 매우 특별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만약 미국 예술에서 훌륭한 작품을 칭하면서 novel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 이때는 당연히 과연 프랜즌이 위대한 작품을 쓴 것인지에 대한 지루한 질문이 나오겠고- 이탈리아 문학에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을 Epics이라고 칭하며, 이것은 문학적 형식와 전통을 지칭하는 명사이다.
많은 위대한 서사시들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나왔다. 베르길리우스과 오비드 같은 로마인들, 기독교도인 아우구스티누스와 단테, 그리고 덜 알려진 시인 토르쿠아토 타소와 토스카나의 아리오스토 루도비코. 제임스 조이스도 이 목록에 포함시킬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이탈리아의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율리시스를 썼을 뿐만 아니라, 율리시스는 호머의 서사시에 대한 라틴어 제목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서사시는 위대한 이탈리아적 형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서사시- 에픽은 오늘날의 국가, 이탈리아라는 나라 보다 오래된 것이기에 이탈리아적 형식이라는 호칭이 부적합하기도 하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페란테의 서사시는 이탈리아 공화국 그 자체보다 더 깊이 있게 이탈리아적이며, 특히 이탈리아의 산업 근대화가 일어난 나폴리에서 일어난 최근의 서사시라고 할수 있다.
이런 사실들은 페란테가 자신의 이탈리아 정치와 현대 역사와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자신의 걸작을 제작하는데 있어 서사시에 의지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베르길리우스 이후 , 서사시는 필연적으로 제국의 설립과 파괴, 그리고 국가의 흥망 성쇠와 관련이 있으며 불가피하게 정치적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어떤 의미에서 호머의 형식을 취했지만,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비교하면 후자는 산만하고, 씻지 않은 오페라들un-washed operas이며, 시적인 전투와 복귀가 긴밀하지 못한 수준으로 서술되어 있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힘이 있는 곳도 아니고, 그들이 인식되어 진 곳도 아니다. 일리아드는 서사시이지만, 그것은 단지 몇주간의 트로이 전쟁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형용사적인 의미에서, 서사시가 되지는 못한다. 그 작품의 요점은 전쟁은 지옥이라는 것이고 몇년이고 몇년이고 몇년동안 길을 잃고 바다를 헤맸다는 것이다.
베르길리우스는 호머를 서사시를 자기 머리속에서 각색했다. 신들의 변덕에 시달려 온 영웅들의 대신에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는 한 인간인 아이네아스와 그가 로마를 발견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관한 것이다. 그의 검을 터너스에 심고 그의 씨앗을 이탈리아의 라비니아에 심는 것이다. 호머적 서사시는 우주의 끊임 없는 잔인함에 정신을 쏟고 있다. 일리아드의 내용은 매우 끔찍한 죽음과 공포의 목록이다, 그리고 오디세이는 우리에게 심지어 승자들 조차도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적 영웅은 그보다 더 영광스러운 운명을 가졌다. 그는 전쟁에서 이기고, 신부와 결혼하고, 제국을 건설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는 카르타고의 Dido와 희희낙낙하고 하고자 했지만 아침에 일찍 일을 하러 가야 했고, 결국 (그의 배신으로 인해) 여왕 디도는 미치고 (자신의 도시인) 카르타고에 불을 질렀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리스 서사시에는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리스의 서사시들은 베르길리우스가 지은 것과 같은 국가의 형성에 대한 젠더적인 우화는 아니다. 그리스 서사시의 중심은 디도에 대한 불타는 열정과 국가에 대한 충실한 집행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만일 트로이의 헬렌의 아름다움이 수천척의 배를 항해하게 한 것이라고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 전쟁은 헬렌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남성의 명예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인이 헬렌을 도둑맞았다면, 그녀를 되찾기 위해 그들은 트로이에서 전쟁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특별히 그녀를 사랑한 사람이 없었기에 그녀는 2차적인 존재였다. 일리아스의 명백한 주제는 아킬레스의 분노인데 아킬레스는 헬렌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아킬레스는 그녀말고, 다른 할 일이 있었다.
베르길리우스 이후 서사시는 로마 제국의 설립, 로마제국의 운명과 그 길을 같이 했다. 서사시가 필연적으로 남성적인 시의 형식이라면- 더 이상 본질적으로 남성적 시적 형식이 없다면, - 서사시는 국가와 그러한 국가를 만든 젠더의 결합이며, 남성의 성적 열정과 애국의 의무 사이의 긴장관계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아이네아스가 디도를 카르타고에 남겨두고 떠난 것과 마찬가지로, 성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에서 자신의 그리스도와의 운명을 찾기 전, 북아프리카에서 누구와 "사랑에 빠져" 희희낙낙 했다는 걸 참회 한다. 단테의 서사시에서도 역시 그는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천국에 있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조차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로마 시대의 서사시들의 남성성은 조국에 대한 사랑인 애국적인 사랑으로 표현된다. 여성은, 만약 그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이 사랑이 심어져 있는 몸이다. 이런 로마 서사시의 남성성은 애국적 사랑, 아버지땅의 사랑으로 표현된다
만약 여러분이 페란테의 작품에서 TV드라마를 기대한다면, 여러분은 페런트의 " 긴 이야기"에 남성 서사시에 대한 참조가 어떻게 흩어져 있는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레누과 릴라의 어린 시절 괴물은 돈 아킬레(아킬레스)는 결국 동네를 공포와 예측 불허의 폭력의 장소로 만드는 모든 근원으로 보이는 이웃이다. 레누는 학교과제로 베르길리우스의 디도에 대해서 쓴다.- 디도는 북아프리카의 공주이며 아이네아스를 사랑했고, 그에게 버림을 받았다. 베르길리우스의 이야기에 있는 렌즈를 통해 레누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멜리나가 애인 도나토에게 버림받는 과정에서 레누와 릴라 그 두사람 열정을 목격했고, 그 후 멜리나가 미친 광기를 보았다. 이것은 디도와 아이네아스의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 한 것이다. "그와 멜리나는 디도와 아이네아스와 같은 열정에 굴복했다." 라고 한 레누는 "이런 건 상처를 주지만 또한 매우 감동적 이야."라고 하지만 릴라는 감동 받지 않았고, 그 반대의 결론을 도출한다. 그녀는 이야기를 만들기 전에 멜리나의 운명을 기억해야 한다고 친구들에게 경고한다. 릴라는 "시를 쓰는 것은 너무 쉽지."라고 그녀는 말한다.
페란테의 긴 이야기는 엄밀히 말하면 서사시가 아니다. 심지어 시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서사시적 전통의 핵심과 연결되어 있으며, 페란테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고전에 대한 학식을 참조한다. 학문에 대한 레누의 사랑은 오비디안Ovidian의 변신이야기를 뒤따르고 있고 릴라의 경계의 해체는 루칸의 뱀들이 자신들의 허물를 발견한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레나의 항해는 하층 계급 나폴리의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한 필사적인 투쟁이다. 그녀는 공부에 몰두하면서,"지구상의 낙원:나의 공간, 나의 침대, 책상, 의자, 그리고 더 많은 책들, 그리고 더 많은 책들, 이웃과 나폴리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의 도시"라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의 끊임 없는 학습은 천국보다는 연옥에 더 가깝운 듯 하지만, 레누는 버지니아 울프적 열쇠 (해결책)를 가지고 있는 단테이다.
레누의 풀네임을 보면 페란테가 서사 시적 전통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Elena Greco"는 말 그대로"그리스의 헬렌Helen the Greco"이라는 뜻이다. 이는 아름다움을 지닌 트로이의 헬렌이 수천척의 배가 띄워지기 전에 그리스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트로이는 그녀가 납치된 장소였다. 만약 그녀가 트로이의 헬렌이 되었다면, 그녀가 그녀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신분을 빼앗기고 자기를 강간한 트로이인에게 내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을 읽으면서, 나는 레나의 어머니의 처녀적 성이 무엇인지, 레나의 어머니가 "(남편의 성인) 그레코를 쓰기 전에 그녀의 성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나는 그것을 결코 알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만약 우리가 엄마의 처녀시절의 성이 무엇인지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여성을 표시하는 또 다른 남성의 이름일 것이기 때문이다. 엘레나 그레코가 처녀적 이름을 버리지 않은 것은 중요하다. 그녀가 쓴 소설과 기사에 표시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레코'는 그녀를 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고, 아버지, 남편, 아이와 연관된 여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 만들어 주는 이름이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방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 자신이 그 이름을 쓰도록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남성으로부터 그녀의 형태를 가져오지 않는다.
엘리나 페런트의 소설 또한 궁극적으로 남성적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성적 형태를 거부하는 것에서 비형식적인 형식을 가져온다. 그녀의 산문은 소설로서, 서사시가 아니다. 평생 동안 여성적인 우정을 유지해 온 나폴리 4부작은 무기와 남성에 관한 폭력적인 노래와는 정반대이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The Story of a NewName'에서 릴라는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페란테의 작품을 묘사할 수 있는 용어로 묘사하고 있다. "오딧세이에 대한 책이냐?" 선생님이 물었다; 그것은 서사시냐라고 묻자 릴라는 대답했다." 아니요, 현세가 얼마나 비참한지에 대해 쓴 책이에요. 우리 머리속에는 쓸데 없은 생각만 가득 차하다고 말해요. 인간은 살과 피와 뼈로 구성된 존재일 뿐이라고. 다 똑같은 거라고. 그저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요(<새로운 이름의 이야기>p,531)"라고요.
페란테의 긴 이야기는 서사시를 산문으로 해체한 것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서사시의 주제인) 무기와 남성"을 현란함, 섹스, 그리고 모더니스트의 우울함으로 대체한다. 고상한 문체는 땅으로 내려왔고 우아한 문장들은 거리와 침실의 저속한 산문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릴라가 조심스럽게 관찰한 형태의 논쟁이 있다. 시가 우리의 머리를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채운다면,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우리는 결국 몸과 욕망, 항상 지저분하고 항상 슬프고 항상 무너진다는 것이다.
페란테는 붕괴, 파편화 경험, 그리고 릴라가가 그녀를 "경계의 해체"이라고 부르는 일관성의 상실에 대한 단어를 가지고 있다. 페란테는 논픽션 'frantumaglia '에서 이탈리아어로 ' la frantumaglia'가 '오직 진정한 내면에 격렬하게 나타나는 불안정한 풍경, 공기나 물의 덩어리'라는 의미의 단어라고 설명한다.
frantumaglia 는 순서나 이야기가 되지 못한 시간의 침전물이다. frantumaglia 는 우리 삶의 닻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안정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상실했다는 감각의 결과이미 frantumaglia 는 곧 우리가 지금 눈앞에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폐허의 풍경에 곧 합류할 것이다.
만약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가 한 인간의 불가피한 운명을 받아들여서, 영원한 로마의 기초를 세우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면, frantumaglia는 한인간의 불가피한 사라짐을 껴안으려는 반 목적적 행동일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형식에 대해 반대를 하는 이 작품에 이름을 부여할 필요를 느낀다면 그것은 frantumaglia이거나, 혹은 멀리 떠난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 Aaron Bady
텍사스 대학의 박사후 연구원으로 아프리카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The New Inquiry의 편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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