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토론기록

04-1. 자유로부터의 도피(2023.4.8)

by 책이랑 2023. 4. 9.

2023년 4월 8일, 모두를 위한 북클럽 4번째 세션의 첫번째 토론을 했습니다. 새로이 참여자가 오셨기에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세션의 주제는 "파시즘"이고 그 첫번째 책은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대중의 심리는 경제적, 정치적 요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두개의 측면에서 모두 연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이 책은 나치즘이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심리적 요인을 고찰하는데 더 집중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이 책은 역사철학적으로, 즉 '이전의 시대들을 철학적으로 고찰해서 당시의 시대정신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면서, 그 정신들이 어떻게 현재를 구성했는지를 하나의 사건으로 기술'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토론을 하면서는 긍정을 하는 부분도 많이 있었지만
우리사회의 근대와 유럽의 근대의 전개가 다른데 이런 분석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은 자유를 누릴 능력이 있는가?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 사랑'은 얼마만큼 유효한 대안일까?

나치즘이 하류중산층에게 가장 큰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인가?

등등의 질문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조금 쉽게 해설한 책인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프롬> 이라는 책의 뒷부분에 보니 프롬의 개신교 신학에 대한 분석 , 나치즘을 지지에 대해서는 틀린 부분이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고 하고  그가 제시한 계획경제모델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리고 프롬의  평전의 저자는 프롬의 글이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든 뒤 갑작스런 활기로 끝” 난다고 했는데요 그이유는 그가 유토피아적 인본주의자였고 구약 유대인의 예언적 전통을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고요.

 

어떻게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 나아갈지에 대한 프롬의 대안은 믿음직해보이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그의 분석은 우리의 삶과 사회구조의 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큰 의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 참가자의 말씀, 그리고 이전부터 고민하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다음에 토론할 책은 본문이 500쪽 분량인데요
가독성이 좋은 편이라고 하니 조금은 안심입니다.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 Escape From Freedom ,1941)』

자아의 상실과 불안, 도피의 메커니즘을 밝힌 에리히 프롬의 대표작으로 근대적 자유주의 폐해와 권위주의 체제가 생겨나는 원인을 깊이 통찰하고 있다.

 

 

 

 

 

이 책은 1941년 히틀러Adolf Hitler 가 '최종 해결책'이라는 이름으로 유대인 학살을 본격화하기 직전에 발간되었다. 프롬은 나치즘이 심리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대중의 심리는 경제적, 정치적 요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두개의 측면에서 모두 연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심리학자로서 나치즘이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심리적 요인을 고찰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프롬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과 상상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댓가로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를 극복하고자 결합과 합일, 초월과 창조, 지향의 틀과 헌신의 대상을 구하려 하게 된다

루터는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교회의 역할을 배제하고 절대군주를 긍정하였고,  칼빈은 예정론에서 세속적인 성공을 강조함으로써 세속적 성공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개인이 만들어졌다. 개인은 과거의 경제적, 정치적 관계의 속박에서 해방되었지만 이 때의 자유는 '경쟁에서 살아 남는 자유' 이기에  개인은 강한 불안감과 무력감, 의심과 고독을 경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권력자에게 조종당하고 착취당하기 쉬운 형체 없는 대중이 되었다.

수백만의 독일국민에게 히틀러 정부는 독일과 동의어가 되어 그와 맞서는 것은 독일인 공동체에서 스스로 쫓겨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중 하류 중산층은 나치이념을 열렬히 환영했는데 경제적요인, 군주제 붕괴 , 인플레이션 , 사회적 위신 하락- 노동자계급 지위 향상, 독일에서 아버지 권위와 중산층의 도덕성이 무너진 것에 대한 좌절감과 분노를 느꼈고 이 분노는 국가 사회주의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목차

     

     

     

     

     

    1. 책을 읽은 소감/인상적인 부분

     

    이 책은 근대적 자유의 특성과 권위주의 체제가 생겨나는 원인을 깊이 통찰하고 근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어떻게 파시즘이 태어나고 지지를 얻는지를 규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은 소감은?

     

    2. 인간이 고독을 두려워하는 이유 – 자유의 역설적 결과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을 잃어버림

    인간은 왜 고독을 그렇게 두려워하는가 [...]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타인들과 협력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
    하지만 어딘가에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그토록 강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주관적인 자의식,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신을 자연이나 타인과는 다른 별개의 실체로 의식하는 사고 능력이다. 다음 장에서 지적하겠지만, 이 의식의 정도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 자의식의 존재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인간은 자신을 자연이나 타인과는 별개의 존재로 의식 하고, 죽음과 질병과 노화를 – 아주 막연하게나마 – 의식하면, ‘그’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이나 우주와 비교하여 자신이 너무나 하찮고 작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어딘가에 속해 있지 않으면, 그의 삶이 어떤 의미와 방향도 갖지 않으면, 자신이 한낱 티끌처럼 느껴질 것이고, 개인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느낌 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그의 삶에 의미와 방향을 줄 어떤 체제와도 자신을 결부시킬 수 없을 것이고, 의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심은 결국 그의 행동 능력, 즉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마비시킬 것이다.

    [...] 인간의 본성은 인간 진화의 산물이지만, 어떤 고유한 메커니즘과 법칙도 갖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는 고정 불변의 요소들이 있는데, 생리적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필요성, 고립과 정신적 고독을 피해야 할 필요성이 그것이다. 개인은 어떤 사회 특유의 생산과 분배 체제에 뿌리를 둔 생활양식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문화에 역동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행동과 감정을 유발 하는 강력한 충동들이 수없이 생겨난다. 개인은 이 충동들을 의식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 지만, 어쨌든 그 욕구들은 강력하고, 일단 생겨나면 충족시켜줄 것을 요구한다. 그것들은 강력한 영향력이 되어, 이번에는 반대로 사회 과정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 이 되면 될수록,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32-34쪽, <제1장 자유 – 하나의 심리학적 문제인가?>)

    인용문에 표시된 페이지 수는 e-book 기준으로 것임.(전체 320쪽으로 설정)

     

    3. 중세시대의 특징, 중세 말기에 등장한 개인주의, 르네상스 시대에 개인이 느낀 불안

    안전감을 잃고, 항상 권력자에게 조종당하고 착취당하는 형체 없는 대중이 되어버렸다.

     

    중세의 모습은 지금까지 두 가지 방식으로 왜곡되어왔다. 근대의 합리주의는 중세를 본질적인 암흑 시대로 보았다. 개인적 자유는 일반적인 결여, 소수에 의한 인가 대다수의 착취, 도시 거주자들에게 외국인은 물론 도시 근교의 농민까지도 위험하고 의심스러운 이방인으로 보게 만드는 사회적 편협성, 미신과 무지의 횡행 따위가 지적되어왔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중세가 이상화되기도 했다. 중세를 이상화한 사람은 대부분 반동적인 철학자였지만, 때로는 근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연대의 의미, 인간의 욕구에 대한 경제의 종속, 인간관계의 직접성과 구체성, 가톨릭교회의 초국가적 주장, 중세인의 특징인 안전감 등을 지적했다. 이 두 모습은 둘 다 옳다. 하지만 두 모습 가운데 하나만 보고 다른 하나에는 눈감아버리면, 두 모습은 둘 다 틀리게 된다.
    . [...]

    사회는 그렇게 구조화되었고, 인간에게 안전을 제공했지만 한편으로는 속박했다. 그것은 후세의 권위주의와 압제가 사람들을 속박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속박이었다. 중세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았다. 그때는 ‘개인’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직도 원초적인 유대관계로 세계와 결부되어 있었다. 인간은 아직 자신을 개인으로 생각지 않았고, 자신의 사회적인(당시에는 또한 자연적인) 역할을 통해서만 자신을 인식했다. 인간은 또한 타인들도 ‘개인’으로 생각지 않았다. 도시에 들어온 농민은 이방인이고, 같은 도시 안에서도 다른 사회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이방인으로 여겼다. 자신의 개인적 자아와 타인 및 세계를 별개의 존재로 보는 의식은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 다.(50-53쪽, <제3장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중세 말기에 사회 구조와 인간의 성격이 바뀌었다. 중세 사회의 통일성과 중앙집권은 점차로 약해졌다. 자본이나 개인의 경제적 자주성이나 경쟁이 점점 중요해졌다. 새로운 유산계급이 생겨났다. 개인주의는 모든 사회 계급에서 뚜렷이 성장했고, 인간의 취미와 패션, 예술과 철학과 신학 등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여기서 이 모든 과정이 부유하고 번영하는 자본가라는 소수 집단과 농민으로 이루어진 일반 대중에게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특히 도시의 중산 층에는 이 새로운 발전이 어느 정도까지는 개인이 진취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와 부를 의미했지만, 본질적으로 중산층의 전통적 생활 방식에 위협이 되었다. 처음부터 이 차이를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차이에 의해 이 다양한 집단들의 심리적 ․ 이념적 반응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 중세의 사회 구조가 이처럼 점진적으로 파괴된 결과,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출현했다. [..] 인간 은 자신과 타인을 개인으로, 즉 서로 독립된 별개의 존재로 발견한다. 그리고 자연을 두 가지 측면에서 자신과는 별개의 것으로 발견한다. 즉 자연은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정복해야 할 대상이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는 점에서는 인간이 즐겨야 할 대상이다. 인간은 현실적으로는 신대륙의 발견에 의 해, 정신적으로는 단테가 “세계야말로 나의 조국”이라고 말했을 때의 그 세계주의적인 정신의 발달을 통해 세계를 발견한다.

    르네상스는 새로운 경제력의 폭풍이 일으킨 파도의 물마루에 올라가 있던 부유하고 유력한 상류계급의 문화였다. 지배 집단의 부와 권력을 나누어 갖지 못한 일반 대중은 과거의 지위에서 누렸던 안전 보장을 잃고, 때로는 아첨을 받고 때로는 위협을 받기도 하지만 항상 권력자에게 조종당하고 착취당하는 형체 없는 대중이 되어버렸다. 새로운 전제정치가 새로운 개인주의와 나란히 등장했다. 자유와 압제, 개성과 혼란은 뗄 수 없을 만큼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

    모든 인간관계는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한 이 사느냐 죽느냐의 격렬한 투쟁에 오염되었다. 동료들, 또는 적어도 자신과 같은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과의 연대는 냉소적이고 초연한 태도로 바뀌었다. 타인들은 이용하고 조종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목적을 위해서는 타인을 무자비하게 말살했다. 개인은 격렬한 자기중심주의, 권력과 부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 사로잡혔다. 그 결과 성공한 개인이 자신과 맺는 관계, 그의 안전감과 자신감 도 해로운 영향을 받았다. 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아도 그에게는 조종 대상이었다. 르네상스 자본 주의의 유력한 주인공들이 흔히 묘사되는 것만큼 행복하고 안전했는지는 의심할 여지가 있다. 새로운 자유는 그들에게 두 가지를 가져다 준 것 같다. 하나는 힘이 더 강해졌다는 느낌이고, 그와 동시에 고독과 의심과 회의주의 그리고 – 이 모든 것의 결과인 – 불안도 늘어났다는 것이다. (55-57쪽, <제3장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4. 근면정신의 확산, 능률의  강조, 시간 개념의 변화 

     

    경제적인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심리적  분위기’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세가  끝날  무렵 근면 정신이 생활 전반에 퍼지기 시작했다. 근대적 의미의 시간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 시간은 너무 귀중해서,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쓰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일이 차츰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되었다. 일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생겨났고, 그것이 지나치게 강해져서 중산층은 교회 제도의 경제적 비생산성에 분노를 느낄 정도였다. 탁발수도회는 비생산적이고, 따라서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능률이라는 관념이 최고의 도덕적 가치의 역할을 맡았다. 그와 동시에 부와 물질적 성공을 얻고 싶은 욕망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열정이 되었다. [...]

    [...] 새로운 경제 질서 속에는 자연스럽고 의심할 여지 없는 자리라고 생각될 수 있는 고정된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은 외톨이가 되었고, 모든 것은 개인의 전통적 지위가 보장해주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 의 노력에 좌우되었다.’

    [...] 
    자본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은 초인간적인 힘이 그들의 경제적 운명을 결정하고, 따라서 그들의 개인적 운명까지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65-66쪽, <제3장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5. 루터의 종교개혁과 칼뱅주의

    - 세속적인 군주에 대한 철저한 복종, 구원을 확인 하기 위해 끊임없이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

    [...] 루터와 신의 관계는 완전한 복종의 관계였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믿음에 대한 그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당신이 완전히 복종하고 개인의 무의미함을 인정하면, 전능한 신은 기꺼이 당신을 사랑하고 구해줄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개인적 자아를 없애고 그 자아가 지닌 모든 결점과 의혹도 함께 없애버리면, 당신은 자기 존재가 보잘것없다는 느낌에서 해방되어 신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루터는 사람들을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시 켰지만, 그보다 훨씬 압제적인 권위에 복종시켰다. 그것은 바로 신의 권위였다. 신은 인간을 구원해주 는 본질적 조건으로 인간의 완전한 복종과 개인적 자아의 절멸을 강요한다. 루터의 ‘믿음’은 자신을 버리면 사랑을 받게 된다는 확신이었다. 이것은 국가와 ‘지도자’에게 개인은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는 주의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해결책이었다.

    루터가 권위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던 점은 그의 정치적 신념에도 나타나 있다. 그는 교회의 권위에 맞서 싸웠고, 새로운 유산계급 – 그 일부는 고위 성직자였다 –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으며, 농민들의 혁명적인 경향을 어느 정도까지는 지지했지만, 세속적 권위인 군주들에게는 철저하게 복종하는 것을 자명한 일로 가정했다. [...]  “신은 서민들의 폭동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그들의 폭동을 허락하기보다는 아무리 사악한 정부라 해도 정부의 존재를 참고 견디 는 쪽을 택할 것이다……. 군주는 아무리 압제적이라 해도 계속 군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군주가 통치 자이기 위해서는 피지배자인 백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백성을 모두 죽일 수는 없고 소수만 참수할 수밖에 없다.”

    [...]  그런데 경제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전통적인 것이었지만, 그가 개인의 무가치를 강조한 것은 그것과는 대조적이었고, 인간은 세속적 권위에 복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성취라는 목적에 자신의 삶을 종속시켜야 한든 쪽으로 생각이 발전할 길을 닦아놓았다. 우리 시대에 이 경향은 파시즘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삶이 목적인 ‘더 높은’ 권력인 지도자 나 민족 공동체를 위해 희생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82-87쪽, <제3장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예정설은 심리적으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개인이 보잘것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을 표현하고 강화한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이보다 강력하게 표현 할 수 있는 교리는 없다.

    [...] 칼뱅주의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신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애써야 하고, 그 노력을 잠시도 게을리하면 안 된다. [...] 이 참을 수 없는 불안 상태와 자신이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괴로운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칼뱅주의에서 두드러지는 바로 그 특성이다. 칼뱅주의에서는 열광적인 활동과 무언가를 하려는 충동이 발달했다. 이런 의미에서의 활동은 강제성을 띤다. ‘개인이 회의와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활동적이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노력과 활동은 내적인 힘과 자신감의 결과가 아니라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도피일 뿐이다.

    [...] 근대 사회에서 새로워진 사실은 외부의 압력보다는 오히려 내적 충동이 사람들을 일로 내몰았다는 점이다.

    [...] 내적 충동은 어떤 외적 강제보다도 효과적으로 모든 에너지를 일에 묶어놓을 수 있었다. 외적 강제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저항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 저항은 일의 효과를 제한하거나, 사람들에게 지성과 창의성과 책임감이 요구되는 차별화된 일을 시키지 못하게 만든다. 일하려는 충동은 사람을 자신의 노예 감독으로 만들어버리지만, 그 내적 충동은 지성과 창의성과 책임감 같은 자질들을 제한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 에너지의 대부분을 일에 쏟지 않았다면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 노예가 아닌 자유민들이 일이라는 하나의 목적에 이토록 철저하게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시대는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끊임없이 일하려는 충동은 근본적인 생산력 가운데 하나였고, 우리 산업 체계의 발달에는 증기와 전기 못지않게 중요한 요인이었다.(92-98쪽, <제3장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6. 권위주의적 성격

     

    7. 독창적인 생각을 방해하는 것들

     – 정보 강조, 모든 진실을 상대화하는 것, 쟁점 흐리기(전문 가에게 판단 위탁), 세계를 구조화한 그림을 파괴하는 것

     

    발췌문은 배포된 논제를 참조하세요.

     

    8. 적극적인 자유, 자발성

    독립된 자아로 존재하지만 고립되지는 않고 세상이나 타인이나 자연과 결합한 상태로 남아 있는 적극적인 자유 상태

    자동인형 같은 인간의 절망은 파시즘의 정치적 목적을 키우기 좋은 비옥한 토양이다. 251

    개인이 독립된 자아로 존재하지만 고립되지는 않고 세상이나 타인이나 자연과 결합한 상태로 남아 있는 적극적인 자유라는 상태가 존재할까?

    우리는 긍정적인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악순환을 이루지 않고, 인간은 자유로우면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고, 비판적이지만 의심으로 가득 차지 않을 수도 있고, 독립적이지만 인류를 구성하는, 없어서는 안 될 일부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이 적극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자아의 실현이란 무엇인가? 관념론 철학자들은 지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이성이 억누르고 감시할 수 있도록 인격을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렇게 분할한 결과 인간의 감정생활만이 아니라 지적 능력까지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성은 자신의 죄수인 본성을 감시하는 간수가 됨으로써 그 자신도 죄수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인격의 두 측면인 이성과 감정은 둘 다 절름발이가 되었다. 자아의 실현은 사고 작용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의 실현을 통해, 즉 감정적 잠재력과 지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잠재력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지만, 겉으로 표현되는 만큼만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자유는 통합된 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는 것이다.’

    [...] 자발적 활동은 개인이 자신의 고독이나 무력함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강박적인 활동이 아 닌다. 또한 외부로부터 제시된 유형을 무비판적으로 채택하는 자동인형의 활동도 아니다.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이고, 심리적으로는 그 낱말의 라틴어 어원인 ‘sponte’가 문자 그대로 의미하 는 것 - 자신의 자유의지로-을 함축하고 있다. [...] 이 자발성에 대한 한 가지 전제는 인격을 ‘이성’과 ‘본성’으로 나누지 않고 인격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아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억누르지 않아야만, 자신에게 투명해져야만, 삶의 다양한 영역들이 근본적으로 통합되어야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 하다.(252-254쪽)

    자발적인 활동이 어째서 자유라는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는가? 앞에서 우리는 소극적인 자유가 개인을 고독한 존재로 만들고, 그래서 개인과 세계의 관계는 멀어지고 불신으로 가득 차며, 개인의 자아 는 약해지고 끊임없이 위협받는다고 말했다. 자발적인 활동은 인간이 본래 모습을 희생하지 않고 고독 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자아를 자발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다시 세 계와 – 인간과 자연 및 자신과 – 통합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런 자발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 속에 용해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것으로서의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사랑, 개체적 자아를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그 개인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의 동적인 성질은 바로 이 양극성에 있다. 사랑은 분리를 극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생겨나 완전한 일체로 이어진다. 하지만 개인이 제거되지는 않는다. 일은 자발성을 이루는 또 하나의 구성요소다. 이 일은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강박적 활동으로서의 일도 아니고, 부분적으로는 자연을 지배하고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생산품을 숭배하고 그 생산품으로 자연을 노예화하는 관계로서의 일도 아니고, 인간이 창조 행위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조로서의 일이다. [...]

    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개인은 세계를 끌어안는다. 그의 개체적 자아는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을 뿐 만 아니라 더 강해지고 단단해진다. ‘자아는 활동적인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255-256쪽)

    만일 인간의 자유가 ‘무엇을 위한 자유’로 확립된다면, 또한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충분히 그리고 타협하지 않고 실현할 수 있다면, 그가 반사회적 충동에 사로잡힐 근본적인 원인은 사라지고, 병들고 비정상적인 개인만이 위험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이 자유는 인류 역사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실현되지 않았지만, 인류가 계속 고수한 이상이었다. 비록 그 이상은 난해하고 비합리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역사 기록이 그렇게 많은 잔인성과 파괴성을 보여준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전혀 없다. 놀랄 일, 그리고 용기를 얻을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인류가 인간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역사를 통틀어 그리고 오늘날 수많은 개인들에게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품위와 용기, 예의와 친절 같은 자질들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더욱 발전시켰다는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64쪽)

     

    "개인이 자발적인 활동으로 자아를 실현하고 
    그리하여 자신을 세계와 관련시키면, 
    그는 고립된 원자 상태에서 벗어난다. 
    그와 세계는 구조화된 전체의 일부가 된다. 
    그는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갖고, 자기 자신과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는 사라진다. 
    이러한 의심은 그가 따로 분리되어있고 삶이 좌절당한 데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그가 강박적으로나 자동적으로 살지 않고 자발적으로 살 수 있을 때 이 의심은 사라진다. 
    그는 자신을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으로 인식하고, 
    '삶의 의미는 하나뿐이라는 것, 즉 산다는 행위 그 자체뿐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there is only one meaning of life: the act of living itself. p.270



     

    ※ 오늘의 토론 소감

     

     

     

     


    [참고자료] 

    ① 에리히 프롬 평전

     

    에리히 프롬 평전 - 10점
    로런스 프리드먼 지음, 앙케 슈라이버 연구 도움, 김비 옮김/글항아리
     국제적인 기고가인 로런스 프리드먼이 쓴 에리히 프롬의 전기다. 어린 프롬이 유대교 율법을 따르는 집안에서 자라던 아주 이른 시기부터 그의 삶의 자취를 따르고 있는 이 책은 여러 나라에 여러 언어로 남겨진 무궁무진한 원고와 자료들을 놀랍도록 철저하게 조사하여 프롬의 생애를 재구성했다. 문화와 환경이 어떻게 그의 사상과 인격을 형성했으며, 히브리어 성경 속 예언자들의 모습과 그의 생이 어떻게 닮아가게 되었는지 증명하고 있는 저자의 연구는 흥미와 예술성에서 탁월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프롬의 생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금 불러일으킬 것이다.

     

    결국 프롬은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퇴출됐지만 저자는 프롬의 사유가 사실상 프로이트의 확장판이었다고 봤다. “프로이트의 기술은 가부장제 중산층 사회의 기이한 특질을 논할 때 유효하다”는 게 프롬의 견해였기 때문이다. 프리드먼은 프로이트와 프롬의 연구 모두를 “히틀러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권위주의에 의해 뿌리 뽑혔던 두 명의 성숙한 유럽인의 생각과 영혼의 삶이 어우러진 춤사위”로 정의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만의 방법으로 인간 사회의 모습에서 “야만, 대량학살을 도려낼 첨예한 칼날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사랑을 해결책이라고 본 프롬에 비해 프로이트는 다소 희망적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된 프롬은 미국, 멕시코 등에 정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학제를 넘나드는 중대한 이슈와 인간적 고민을 다뤘고, 유작 ‘소유냐 존재냐’(1976)에 이르기까지 숱한 저작을 쏟아내 한결같이 사랑 받았다. 유럽 독자들은 특히 증오, 폭력의 굴레에 빠진 불능의 시대를 우려한 지식인의 등장을 반겼다. 순응보다 자각을, 소유보다 절제와 집중을, 증오보다 사랑과 내면의 성찰을 강조한 저술이 큰 공감을 샀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는 특유의 예언자적 글쓰기와, 이분법적 기술 방식 등으로 대중에게 쉽게 다가갔지만 여기엔 늘 학계와 평단의 지적이 따랐다. 인류학자들은 인격 형성에 특정한 과정이 있다는 그의 전제를 불편해했고, 역사학자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더 고립된 현대적 개인을 만들었다는 프롬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했다. 평단은 갑자기 ‘사랑’을 논하며 낙관적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을 허술하다고 했다. 프리드먼은 이런 지적들이 일정 정도는 사실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프롬의 글이 “사람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든 뒤 갑작스런 활기로 끝나는” 이유가 그가 유토피아적 인본주의자였고 구약 유대인의 예언적 전통을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② <불복종에 관하여>

    불복종에 관하여 - 10점
    에리히 프롬 지음, 김승진 옮김/마농지

    민주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회주의의 비전을 제시하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관리 산업주의와 공산주의적 관리 산업주의라는 두 가지 길 외에는 없는가? 프롬이 제시하는 대안은 민주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사회주의다. 모든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최종 가치를 ‘인간’에 두며, 인간이 사물보다, 노동이 자본보다 앞서는 사회. 국가,민족,계급 숭배에 반대하고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며, 국제주의를 지지하고, 주체적 개인의 잠재력과 역량을 펼칠 수 있게 하는, 인간이 자본을 지배하는 사회의 비전이다.


    프롬은 이러한 사회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목표들을 구분해 정식화한다. 노동자의 경영 참여, 협동조합 기반, 극단적 소득격차 배제, 풀뿌리 민주주의, 창조적인 교육, 평화적인 국제연방, 인종과 성별의 평등, 예술 활동 지원 같은 구체적인 지침들, 그리고 사회주의 정당의 임무에 대해서도 세밀한 방안들을 제안하고 있다.


    아무런 이상도 제공하지 않고 아무런 신념도 요구하지 않고 더 많은 소유 외에는 아무런 비전도 없는 것. 프롬은 이런 현대 사회의 취약함에 맞서 인간적인 형태의 새로운 사회를 일구어가자고 호소한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인본주의의 이상을 산업사회의 조건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607011522469867

     

    에리히 프롬, 인류를 향한 외침은 '사랑'

     

    www.hankookilbo.com

    ③ 주요 키워드(출처:<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참을 수 없이 불안할 때, 에리히 프롬 - 10점
    박찬국 지음/21세기북스

    사랑

    프롬은 사랑만이 우리를 불안과 절망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을 이렇게 중시하기에 그는 '사랑의 예언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사랑만큼 많이 운위되는 말도 없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프롬의 사상은 진부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주위에서 접하는 많은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 왜곡된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을 상대방에 대한 소유욕이나 집착과 혼동하거나 상대방을 우상시하는 것 등과 혼동한다. 프롬은 상대방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보살핌, 상대방에대한 '책임'과 '존경'을 참된 사랑의 요건으로 들었다. 또한 참된 사랑은 자기 주위의 몇 사람에 대한 사랑에 그치지 않고 사해동포주의적인 성격을갖는다.

     

    소외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인간을 지배하는 낯선 힘이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19세기부터 쓰였다. 그러나 프롬은 구약성서가 말하는 '우상숭배에서 이미 소외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사태를 찾아볼 수 있다고 보았다.
    우상은 식물이나 동물, 민족이나 인종 혹은 계급, 종교적인 교의나 정치적인 교의, 돈 등의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다. 프롬은 현대자본주의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그것이 인간을 소외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는 데서 찾는다.

     

    실존적 욕망

    프롬은 인간에게만 특유한 욕망이 있다고 보았다.
    ① 고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합과 합일을 원하는 욕망,
    ② 무력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을 느끼고 싶어 하는 창조와 초월에의 욕망,
    ③ 허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삶에 숭고한 의미와 방향 그리고 목표를 부여하는 지향체계와 헌신의 대상을 구하는 욕망
    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욕망은 인간이 처해 있는 독특한 실존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실존적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신비체험

    진정한 의미의 종교적인 체험을 가리킨다. 즉 의식이 완전히 깨어 있으면서도 고요한 평안이 지배하는 상태다. 프롬은 신비체험이란 인간이 자신의 신적인 본질을 깨달으면서 자신에 대해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는 체험인 동시에, 자신이 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라는 것을 느끼는 겸손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소유양식

    삶의 의미와 행복을 더욱 많은 물질이나 명성 혹은 지위와 같은 외적인것을 소유하는 데서 찾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프롬은 소유양식은 이기심에 입각해 있으며, '인본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사회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기심에 바탕을 둔 소유욕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존재양식

    지혜와 사랑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능력을 실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완성하는 데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모든 사물을 존중하고 그것들과 교감을 나누면서 그것들의 성장을 돕는 삶으로서,프롬은 이러한 삶의 양식이 지배하는 사회를 '인간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종교적 회심

    프롬은 자본주의사회의 우상숭배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사회의 변혁을 위해서는 사회구조의 변혁뿐 아니라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일종의 '종교적 회심(回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에리히 프롬 주요저작

     

     

    모임운영: 이승은

      
    • 서강대학교 독어독문학 박사 (독일여성문학 전공)   
    •  (前) 서강대학교 독문과 강사.   
    •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문학 담당 교수.   
    •  (前) 김포대학교 국제교류처 한국어과정 강사.  
    •  한겨레문화센터 <Herstory: 여성문학 북클럽> 강사.   
    •  <페미니즘 함께 읽기> <Herstory 여성문학 북클럽> 모임 운영.(숭례문학당)   
    •  (前) 청소년 대상 <책을 통해 자라는 아이들> 독서토론 강사.   
    • 우장산숲속도서관 <페미니즘 함께 읽기> 강사.   
    • 우장산숲속도서관<재난과 불안의 시대, 인문학으로 치유하다> 토론 강사  
    • <여성문학 읽기> 토론 모임 운영 
    • 대안연구공동체
      <모두를 위한 북클럽> 진행중 https://cafe.naver.com/paideia21/15690
      <문학에세이 쓰기> 진행중 https://cafe.naver.com/paideia21/15405
      <함께, 고전 문학 깊이 읽기 > 진행중https://cafe.naver.com/paideia21/14611


    • 출간 작품   
      『아버지의 덫』, 『공모자들』, 『행복한 엄마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등 다수의 번역서 출간.   
      『글쓰기로 나를 찾다』 공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