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토론기록

03-4. 지구를 구할 여자들(2023.2.25)

by 책이랑 2023. 2. 19.

2월 25일 토요일, 마포구 서교동 대안연 강의실에서 <지구를 구할 여자들>로 토론 했습니다. 저자는 카트리네 마르살의 책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총 5개의 범주를 설정한 후  각각에  2개의 장을 할당해서  총10개의 장으로 서술했습니다.

저자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주류경제활동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했는지를 설명하며 미래를 위해 그러한 가치체계와 행동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Invention 발명의 확산을 가로막은 '남성성'과 '여성성' 관념(바퀴달린 여행가방, 자동차 시동장치)
Technology 기술 '여성적'인 것=열등한 것
Feminity 여성성 주류경제활동에서 여성적 가치를 배제하는 현상에 대하여
Body 신체/몸,  인간=이성적 남성 개념의 한계
Future 미래를 위한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후기를 쓰기 위해  알라딘에서 저자의 전작인 <잠깐 아담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 줬어요?>에 대해 읽어봤는데요,  한 블로거 후기가 두 책을 아우르는 생각을 잘 표현하는 것 같아 소개해 봅니다.

저자가 보기에 경제학은 인간이 얻는 경험 전체를 포용하는데 필요한 도구와 방법을 갖고 인간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즉, 인간이 탐욕과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해아하며, 사회적 지향점을 찾아 현대적 경제체제에 반영하도록 연구해야 하고, 인간과 사회발전을 위한 기회를 만들고,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봐야하며, 관계를 모든 것의 근본으로 파악하고, 인간을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에 따라 현존하는 존재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출처: 알라딘 블로거 닷슈님의 글 https://blog.aladin.co.kr/746579178/13505205

주류경제학이나 과학기술에서 상정하는 인간의 존재와 발전의 개념이 다시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고 하고요.

그런 가치관이 사리에 맞지 않음을 알고 있었고 내내 불편하다고 느껴왔지만,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그러하다는 건 이만큼 자세히 생각해보지는 못했습니다.  내가 기쁠 때는 정작  '여성적' 인 가치가 실현될 때인데도, 실제로는 '남성적' 가치를 따라가는데 열중해왔던 것 같습니다. 

 

저는 종종 '책은 꼭 읽어야 하나? 다른 사람과 토론 하러 가는게 시간낭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어제 토론하면서는 앞으로도 쭉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4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고도 책 읽은 소감과 토론소감도 받아적지 못했어요. 선생님의 발제를 다시 한번 읽어보시면서 각자 정리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다음토론은 3월 11일 이고 <낙인찍힌 몸>으로 토론합니다. https://f-reading.tistory.com/424

 

 

 

 

■ 토론도서:  『지구를 구할 여자들 Mother of Invention (2021)』(카트리네 마르살, 부키, 2022) 
■ 일시 :2.25 (토) 오전10:00 ~ 오후 1:00
■ 장소 : 대안연 강의실(온+오프 병행) 

 

 

목차

     

     

     바퀴 달린 가방에서 전기차와 AI까지, 편견과 차별은 어떻게 혁신을 가로막는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캐리어’라고 부르는 바퀴 달린 가방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가 지나서다.그 이전에 이미  선보여졌으나 ‘진정한 남자는 무거운 짐을 직접 든다’ ‘여자는 짐을 들어 줄 남자 없이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라는 성별 고정관념에 때문에 널리 사용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저자는 발명, 기술, 여성성, 몸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과학기술의 발전 과학정에 있었던 편견과 차별에 대해 설명하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그런 방향과 태도가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요약


    '발명'의 확산 과정 -'남성성'은  기술혁신을 방해할 만큼 강력했다.
      ⊙ 바퀴달린 짐가방
      ⊙ 자동차 시동장치

    기술의 가치평가에 깃들어 있는 편견 - '여성과 관련된 것'= 열등한 것
      ⊙ 우주복
      ⊙ 프로그래머의 임금 수준의 변화

    ■ 경제활동에서 이루어 지는 '여성성'의 배제와 수용
      ⊙ 고래 사냥과 페이스북의 공통점 -   '여성적' 가치의 배제
      ⊙ 인플루언서 - 소비 주체로서의 여성의 파워

    '몸' 을 배제한 사고가 만드는 환상과 착각
      ⊙ 기계와 디지털이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
      ⊙  '인간=이성적 학문적 남성성= 세상의 지배' 라른 생각

    ■ 미래를 위해 우리가 할 일
      ⊙  '관계 경제'와 '돌봄경제'를 고려하지 않는 주류경제학
      ⊙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 모델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1] 책읽은 소감

    [2]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일어났던 차별과  편견의  역사

    -  바퀴  달린  여행  가방,  전기차,  우주복  제작  기술 등 

    사람들이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그  가방이  남성성에  관한  지배적  견해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명백히  괴상한  일이다.  ‘진정한  남자는  가방을  직접  든다’라는  무척이나  자의적인  개념이  이제는  누가  봐도  명백한  혁신을  방해할  만큼  강력했다니?  남성성에  관한  지배적  견해가  돈을  벌겠다는  시장의  욕망보다  더  완강한  것으로  드러나다니?  남자는  무거운짐을  들  수  있어야  한다는  유치한  생각  때문에  전  세계  산업을  뒤집을  상품의  잠재력을  알아보지  못했다니?

    바로  이  질문들이  이  책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세상은  특정  남성성  개념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사람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남자는  채소를  먹지  않는다’  ‘진정한  남자는  사소한  문제로  건강  검진을  받지  않는다’  ‘진정한  남자는  섹스할  때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다’  같은  믿음이  말  그대로  매일같이  피와  살이  있는  진정한  남자들을  죽이고  있다.  남성성은  우리  사회가  가진  가장  고집스러운  개념이며,  우리  문화는  종종  특정  남성성  개념을  보존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성성  개념은  5000년  동안  기술  혁신을  방해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식으로  혁신과  젠더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89  –92쪽)

    전기차는  안전성과  조용함,  편안함을  상징했다.  이  가치들에  본질적으로  여성스러운  점은  전혀  없다. 오히려  이것들은  인간적인  가치들이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우리가  ‘여성적’이라  불러  온  것들은  인간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만약  전기차가  ‘여성적’이라면  그건  전기차가  ‘열등’하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며,  이는  초기  전기차  산업이  부딪힌  개념  중  하나였다.  (191쪽)

    우리는  부드러운  것을  어딘가  덜  전문적인  것으로  여기곤  한다. 이는  주로  여성과의  연관성을  대하는  태도다.

    기술은  남성이  커다란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  딱딱한  금속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배운다.  [...]

    그렇기에  우리는  혁신하고자  하는  욕구가  주변  세상을  죽이고  정복하려는  욕구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서사가  정말  사실일까?  [...]  (241쪽)

    우리는  창과  뒤지개  중  무엇이  먼저  발명되었는지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서사다.  우리는  분명히  창이  먼저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혁신은  반드시  무기와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먹을거리를  모으던  여성이  먼저  날카로운  막대기를  발명한  뒤  나중에  그  막대기를  사냥에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곤봉과  창이  인간의  첫  번째  도구라고  추정하는  것일까?  이렇게  추정하면 인간  발명의  추동력이  주변  세상을  지배하려는  욕구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믿게  된다.  여성이  서사에서  지워질  때  인류는  본래와  다른  모습이  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더  나아가면  우리는  자신의 본성을  스스로  속이게  된다.  가부장제가  미치는  가장  심각한  영향  중  하나는  우리의  진짜  모습을  잊게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여성적인  것으로  코드화한  인간  경험의  측면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재인식한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정의가  통째로  변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늘  인간이  남성과  동일시된다는  점이다.(255  –  261쪽)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1969년  달에  갈  때  입은  의복은  우리가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이라고 인식하는  기술  사이의  여러  경계를  무너뜨린  회사에서  제작한  것이었다.(291쪽)

    ※  인용문에  표시된  페이지  수는  e-book을  기준으로  한  것임.(전체  1180쪽으로  설정)

     

    [3]  ‘여성적인  일’과  ‘남성적인  일’에  대한  규정과   남녀의  임금  격차

     

    컴퓨터는  처음부터  지위가  무척  낮은  직업이었다.  보통  8~10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같은  계산을  하고  또  해야  했다.  19세기가  시작될  무렵  정부와  대학,  천문대는  엄청난  양의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
    고,  이  자료들은  분류와  처리  과정을  거쳐야만  항해  등의  분야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인간  컴퓨터의  수요도  증가했다.

    이때까지  컴퓨터는  대부분  젊은  남성이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고용주들은  남성  대신  여성을  고용하면  큰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용  절약은  언제나  매력적인  전망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급여를  적게  받았다.  여성에게는  남성에게  주는  돈의  절반을  주고도  아무  불만을 듣지  않을  수  있었다.(321쪽) 여성  노동자  개개인이  일을  잘하지  못하면  그건  여성  전체가  임금을  적게  받아야  한다는  증거가  되었다.  저거  봐,  여자들은  남자만큼  일을  못  한다고!

    그러나  동시에  정확히  반대의  주장도  할  수  있었다.  여성  노동자  개개인이  일을  잘하면,  그  또한  여성이  임금을  적게  받아야  한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게  뭐든  간에  일에  대한  자질은  전부  여성이  돈을 적게  벌어야  하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비결은  여성이  뛰어나게  잘하는  일을  전부  ‘타고난  여성적  자질’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여성은  그저  생물학적으로  실크  스타킹의  발가락을  깁고,  컴퓨터를  프로그래밍 하고,  노인을  돌보는  일에  재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노인과  아이들을  돌보는  직업에서  사회는  심심치  않게  이런  추론에  기댄다.  사람들은  여성이  이러한 직업을  얻은  뒤  정식  교육을  많이  받지  않고도  일을  잘  해내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거로 삼아  이  직업이  ‘저숙련  노동’이며  그러므로  좋은  보수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반면  어떤  남성이  ‘무언가에  타고난  소질’을  보이는  것은  정반대의  증거가  된다.  남성이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349-353쪽)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가  여성이  ‘저임금  분야를  선택’한다는  주장으로  남녀의  임금  격차를  얼버무린다.  그저  여성이  컨설턴트  대신  간호사를,  제약업계  로비스트  대신  조산사를  고집스럽게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러나  다양한  직업과  관련된  ‘일’의  정의는  우리의  젠더  관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

    어떤  직업은  기술적인  것으로,  어떤  직업은  기술적이지  않은  것으로  지정하고  그  둘의  위계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면,  우리의  의료  체계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게다가  도구를  사용하는  직업이  꼭  고용  시장에서  더  높은  급여와  지위를  자랑해야  할까?  도구를  사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일이  더  힘든  것은  아니다.  태아의  어깨  뒤쪽이  산모의  골반에  걸리면  조산사는  산도에  손을  넣어  태아의  팔을  잡아당겨  꺼내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수년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도구가  아닌  손으로  하는  일은  그리  전문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추정한다.  ‘여성적’인  일이  저임금  노동과  동일시되는  것은  우리가  여성이  하는  일을  기술적인  것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273-278쪽)

     

    [4]  가부장제  사회에서  경시당한  여성적  가치,  혁신과  발명에  대한  남성적  개념이  인류의  발전에 끼친  해악.

     

    가부장제의  비극은  인간의  경험을  둘로  쪼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삶의  어떤  측면은  여성적이고 어떤  측면은  남성적이라고,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을  대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의  우위에  서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에서  우리가  ‘여성적’이라  칭하는  가치들이  밀려 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남자아이들을  키워  온  방식은,  다른  무엇보다  ‘여성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자기  안의 모든  특성을  차단하고  거부하고  억압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울지  마,  그렇게  예민하게  굴지  마,  꽃 앞에  서서  감탄하지  마.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런  특성들은  전부  인간  삶의  모습이다.

    동시에  우리가  남성에게  허락하지  않는  모습이다.

    경제에서도  우리는  똑같이  행동한다.  감정과  의존성,  유대감처럼  여성적인  것으로  코드화된  가치들과 ‘부드럽다’라고  간주되는  모든  것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런  것들은 경제라는  단단한  세상  속에  존재할  권리가  없다.  만약  존재한다면,  반드시  부차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환경에  대한  배려,  사회  정의는  전부  좋은  것들이지만,  시장  지배와  사생결단의 승자  독식  경쟁  같은  것에  비하면  별볼일없는  잔챙이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러한  경제  논리(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을  대체하는  논리)를  지탱하려  하면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는다.

    거기엔  우리  자신도  포함된다.

    혁신이  ‘짓밟는’  대신  ‘치료’할  수는  없을까?  새로운  발명품이  ‘파괴’하는  대신  ‘도움’을  주면  안  될까?  ‘지배’하는  대신  시장  생태계에  ‘기여’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가  투자하기로  선택한  대상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그리고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준다.  우리는  현재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니  누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수백만  달러를  쏟아붓고  있는가?  그리고  누구의  문제를  보지  않고  있는가?

    [...]  그동안  우리는  ‘여성적’이라고  묘사되는  가치들을  경제에서  배제해  왔다.  우리는  그  가치들을  사적  영역(‘돌봄’‘치료’‘도움’‘보존’이  허용되는  장소)에  속하는  것으로  치부한다.  심지어  당신이  여성이라면,  그러한  영역에  속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이와  달리  시장은  ‘짓밟고’‘파괴하고’‘지배’하기  위한 장소다.  지금껏  살펴봤듯이  이와  같은  혁신의  정의는  많은  여성  사업가를  배제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최악은  아니다.

    가장  최악은  수많은  발명이  개발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는  것이다.(468-474쪽)

     

    [5]  정신과  몸의  이분법

     

    [...]몸은  남성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상기시킨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  몸은  언젠가  죽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몸은  언젠가 병들고  노화해  남성이  타인과  주변  환경에  의존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남성은  이  사실을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의존성은  남성의  젠더  역할에  들어맞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가부장제의  근본적  비극으로  되돌아왔다.  젠더를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정의하면  그  누구도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경험할  수  없다.

     

    [6]  보편적  기본  소득  논의가  이루어지는  이유

    경제에서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이  사람들은  자기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

    이것이   바로   다수의   유명한   테크   업계   억만장자들이   최근   보편적   기본   소득 niversal   basic income,  UBI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유다.  보편적  기본  소득은  직업이  있건  없건  국가가  모두에게  매달  일정  금액의  소득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백만  명이  경제의  ‘여분’이  된다면  적어도  그들이  굻어  죽지  않도록  돈을  지급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이다.  바라건대  이는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즉  엘리트  집단은  자기들끼리  남겨지기  위해  지갑을  열고  있다.  보편적  기본  소득을  줄  테니  DNA  조작한  우리  몸과  무장한  하인  로봇은  가만  놔둬.  이렇게  부탁할게.(794-795쪽)

     

    [7]  ‘소프트  스킬’의  중요성  –  가장  중요한  사회의  기반

    ‘그러한  요소들’의  상당수는  바로  기계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들이다.  감정  지능,  인간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  한자리에  모인  개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이해하고  순조롭게 다루는  능력,  타인에게서  최선의  모습을  끌어내는  능력,  집단의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처럼  말이다.  사실  우리가  거들먹거리며  ‘소프트  스킬soft  skill’이라고  이름  붙인  것들이  거의  전부  ‘그러한  요소들’에 해당한다.  남성  미래학자들은  기계의  IQ가  더  높아지면  인류는  끝장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식  경제의  바탕에  언제나  미래학자들이  한  번도  제대로  주목한  적  없는  많은  요소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시된  것이  바로  ‘관계  경제’와  ‘돌봄  경제’다.

    우리는  감정과  관계,  공감,  인간과의  접촉이  경제에  얼마나  중요한지,  또는  이것들이  얼마나  우리  인간성의  중심에  있는지를  인식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이것들을  케이크  위에  올린  체리  같은  것으로,  즉  사회의  근본  기반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  뒤이은  장식으로  여기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이
    것들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의  기반이다.  어쩌면  로봇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보여줄  수  있고,  그러므로  신기술은  우리의  인간성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인간적으로  만들어  줄  잠재력이  있다.

    엥겔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내내  메리였다.  (881-884쪽)

     

    [8]  인간과  지구  사이의  건강하지  못한  관계

    서구  세계는  자연이  인간의  지배를  위해  존재한다고  배워  왔다.  아담이  동반자가  필요했고  갈비뼈 하나를  포기할  수  있었기에  여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만큼  자연과  여성은  주로  남성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바로  이  생각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여러  문제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중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아마  기후  위기일  것이다.

    오늘날  기후  위기를  가장  열심히  부정하는  정당과  정치  지도자는  여성의  기를  꺾고  싶어  하는  정당및  정치  지도자와  거의  일치한다.  (926-927쪽)

    기후  변화는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혁신  문제이며,  동시에  우리의  여러  젠더  관념과  얽힌  문제이기도  하다.  진정한  남자가  된다는  것은  곧  자연을  지배한다는  뜻이며,  자연을  위한  그  어떤  타협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타협이야말로  현재의  기후  위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연료  소모가  큰  특정  생활  방식이  ‘남자다운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린  뒤  이  남성적  논리를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선시했다.  이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생활  방식이  지속  불가능한  것으로  밝혀진 후에도  우리는  그  방식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  가치를  다른  무엇보다  중시하기  때문이다.

    죽음마저  불사할  정도로.  (930-932쪽)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어감은  참  좋다.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  불평  한마디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욕구는  전
    혀  없고  오로지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

    우리는  지구가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  우리  사회에는  여성이  아무런  보상이나  요구,불만  없이  돌봄  노동을  수행할  것이라는  기초적  경제  가설이  있다.  그러므로  자연이  여성이라면,  자연
    에게도  분명  똑같은  돌봄의  의무가  있다.  자연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곁에 서  우리를  돌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어머니다.  저  마녀를  불태워라!(940-943쪽)

     

    [9]  우리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필요한  기술.  우리에게는  마녀가  필요하다.

    [...]  마녀와  마법사의  차이는  자연과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마법사는  자기  탑  안에서  두꺼운  책을  연구한다.  책이  제공하는  지식을  흡수하고  그  지식을  성벽  너머의  세상에  적용하는  법을  배운다.  한편  마녀는  숲속에서  더러운  맨손으로  마법의  약초를  캔다.  그밖에  마녀는  (좋은  마녀든  사악한  마녀든)  의식도 행한다.  숲의  가장자리에서  나체로  춤을  추고,  희미한  달빛  아래  제물을  바치고,  생리혈이나  약용  식물같은  것으로  일종의  의식을  거행한다.  즉,  마녀에게는  늘  영적인  측면이  있다.

    [...]  마녀가  식물을  모르고  파악하려  하는  이유는  그  식물이  자신에게  마술적  힘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식물과의  관계가  자신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법사는  굳이  그러려  하지  않는다.  마법사가 마술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마술을  통해  외부  세계에  힘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마법사는  현
    대  사회를  지배하는  기술관에  훨씬  가깝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마녀가  필요한  이유다.  마녀가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마녀가  아직  가  보지  않은  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마법사와  예언자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을  자연과  분리된  존재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동안 남성성은  그렇게  정의되었다.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가  아니다.  자연과  당신은  분리되어  있다.  자연을 훼손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훼손하는  것과  같지만,  우리가  자연을  계속  ‘여성적’인  것으로,  ‘여성적’인  것을  기술이라는  남성적  힘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이러한  자기  훼손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990-995쪽)

    기술의  역사에  여성이  가진  도구를  포함하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만약  인류  최초의  도구가  사냥  도구가  아닌  뒤지개였다면,  인류의  발명이  언제나  짓밟고  장악하고  착취해야  한다는  생각은  확실성을  잃는다.  우리가  여성을,  여성으로  상징하고자  한  것을  더  이상  무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과  경제,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서사  전체가  달라진다.  우리가  밟고  선  땅이  움직이고,  새로운  방식이  등장한다.

    여기  발명의  어머니가  있다.

    발명의  어머니는  이제  집에  돌아올  시간이라고  말한다.  (999-1000쪽)

     

     

    모임운영: 이승은

      
    • 서강대학교 독어독문학 박사 (독일여성문학 전공)   
    •  (前) 서강대학교 독문과 강사.   
    •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문학 담당 교수.   
    •  (前) 김포대학교 국제교류처 한국어과정 강사.  
    •  한겨레문화센터 <Herstory: 여성문학 북클럽> 강사.   
    •  <페미니즘 함께 읽기> <Herstory 여성문학 북클럽> 모임 운영.(숭례문학당)   
    •  (前) 청소년 대상 <책을 통해 자라는 아이들> 독서토론 강사.   
    • 우장산숲속도서관 <페미니즘 함께 읽기> 강사.   
    • 우장산숲속도서관<재난과 불안의 시대, 인문학으로 치유하다> 토론 강사  
    • <여성문학 읽기> 토론 모임 운영 
    • 대안연구공동체
      <모두를 위한 북클럽> 진행중https://cafe.naver.com/paideia21/15407
      <문학에세이 쓰기> 진행중 https://cafe.naver.com/paideia21/15405
      <함께, 고전 문학 깊이 읽기 > 진행중https://cafe.naver.com/paideia21/14611


    • 출간 작품   
      『아버지의 덫』, 『공모자들』, 『행복한 엄마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등 다수의 번역서 출간.   
      『글쓰기로 나를 찾다』 공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