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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모두를 위한 북클럽

05-5.아침 그리고 저녁(2024.08.10)

by 책이랑 2024. 8. 13.

8월 10일 토요일 10시 합정동 대안연구공동체 강의실에서 <아침, 그리고 저녁>으로 토론을 했습니다. 문장부호를 거의 쓰지 않고  10개의 마침표만을 쓰는 등의 독특한 서술기법에 대해, 반복에 대해 삶과 죽음이라는 모든 인간이 겪는 경험에 집중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주신 논제를 정리하고(논제에 넣어주신 본문은 생략했습니다.)
참고자료를 정리해보았습니다.

 

가디언지 인터뷰, 노벨문학상 수상연설, 국내 연극잡지 기사, 출판잡지의 기사 등 네편입니다. 마지막의 출판잡지 기사는 내용이 매우 풍부하네요.

 

참고자료들을 다 읽고 보니,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7살 때의 경험과 퀘이커 교도로서의 경험, 음악을 했던 경험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작가에 따르면 중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일어나서 책을 읽으라고 지시하자 너무 당황해서 문밖으로 나와버렸다고 하고 나중에 화장실 가느라고 그랬다는 변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 경험에서 공포라는 것이 자신의 말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말을 찾기 위한 수단으로 글을 썼다고 해요. 쓰는 행위에서 안정감을 얻었다고 하고요.

 

저자는 청소년기 이후 음악을 그만둔 후, 음악을 거의 듣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그에게 글을 쓰는 행위는 "듣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에게 쓰기는 자기의 내면인지 아닌지,  어딘가인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있는 것을 빠르게 받아 적는 것이라고 해요. 그래서 그에게 쓰기는 곧 =듣기라고 합니다. 

 

욘 포세는 언어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침묵'에 대해  그리고 현대 사회와 기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기 내면과 영적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한 사람이 인생에서 겪는 여러 가지 사건들의 의미가 아니다.

그는 인간 전체가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삶의 공백을 탐구한다.

그것은 이름과 지위와 사건을 지워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일이 일어나고, 사람이 죽고, 이혼하나, 그 안에는 진정한 평화가 깃들어 있다"

 

 

 

 

 

 



 



 토론도서: 『아침 그리고 저녁』(욘 포세, 문학동네, 2019)
 일시 :2024.8.10 (토) 오전10:00 
 장소 : 대안연구공동체 강의실 + zoom
 
 

 

목차

     


    [1] 책 읽은  소감   / 인상적인  부분  혹은  문구

     
     
     이  책은  노르웨이의  헨릭  입센의  뒤를  잇는  희곡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욘  포세(1959~)가  2000년에  발표한  중장편소설입니다.  이  작가는  1983년  장편소설  『레드,  블랙』으로  데뷔했으나  1994년  희곡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98년  이후  뉘노르스크  문학상을  비롯한  다양한  문학상을  받았고  2023년에는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인간의  탄생과 사랑,  그리고  죽음을  응축된  문장  속에  원형에  가깝게  축약해  낸  실험적  텍스트로  평가받는  이 작품을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셨나요?  책을  읽으신  소감과  인상적인  부분  혹은  문구를  자유롭게 이야기해  봅시다.
     
     

    [2] 작가의  서술기법에 대해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 작품은 매우 실험적인 기법이 사용된 것으로 평가받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그런 의도로 쓴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 한 작가의 서술기법에 대해 어떻게 보셨습니까?

    문장부호 사용의 절제, 짧은  단문들이  계속  쉼표로  이어지는 것,  10여회의 마침표
    동일한  표현과  단어의  반복, 장(챕터)이  나뉘어져  있기는  하나  소제목이  붙어  있지  않는 것 ,
    화자가 수시로 바뀌는  것, 어눌한  구어체와  비문 등

     

     

    단문의 일상 회화체로 보이지만
    그의 언어는 반복과 생략, 그리고 길고 짧은 사이 pause로 구성된 인위적 의미체계이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걷어낸 어휘들로 구성된, 순수하고 음악적인 언어

     

    [3] 신과 인간의 삶에 대한 올라이의  생각에 대해

    - 자애로운 신은 존재한다고 확신하나 이 세상은 좀 더 미약한 신이나 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  아이는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떨어져 추운 세상으로 나온 후 혼자가 되고 언제나 혼자일 것
    -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
    등 (pp.12~16)

     

    [4] 죽음/그 죽음 직후 이 세상을 떠나가는 과정

    pp.119-120

     

    [5] 이 작품의 주인공이 여성이었다면

     

    [6] 자신의 ‘아침’과 저녁’에 대해

     

     탄생의 아침과 죽음의 저녁
     침묵과 리듬의 글쓰기로 포착한 전 생애의 디테일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 '요한네스'라 불리게 될 아기. 그가 노르웨이의 작은 해안가 마을에서 생을 시작하고 또 스러져가는 순간들이 마침표 없이 띄어쓰기와 쉼표로 이어진다.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와 분리되어 혼자가 되고, 삶의 높은 파고를 넘기도 하고, 인연 속에 머무르기도 하면서, 다시 처음 있었던 곳으로 '무에서 무를' 향해 흘러 간다.

     

    ※ 참고자료 

     

    ① 가디언지 인터뷰 2023.10.28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23/oct/28/nobel-prize-winner-jon-fosse-it-took-years-before-i-dared-to-write-again

     

    Nobel prize winner Jon Fosse: ‘It took years before I dared to write again’

    In 2012, the Norwegian novelist and playwright collapsed. He gave up drinking, retreating from the public eye – then, earlier this month, he got a call from the Swedish academy. He discusses how it feels to win a Nobel prize

    www.theguardian.com

     

     

    "말할 수 없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
    39권의 소설과 단편 소설집, 40여 편의 희곡(그 외 다수의 번역본), 13권의 시집, 소수의 아동 도서 등
    인구의 약 15%가 사용하는 노르웨이어의 한 형태인 니노르스크어로 쓰였으며, 대부분 베르겐을 중심으로 한 서부에서 활동했습니다(포세는 노르웨이 서부, 오슬로, 남부 오스트리아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
    그의 글은 정치적인 영역보다는 영적인 것과 존재의 사소한 것,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얽혀 있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는 "니노르스크에서 글을 쓰고 저처럼 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글에는 일종의 정치적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10대에 무신론자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다소 엉망이었지만 적어도 좌파 쪽에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현재 자신을 좌파라고 설명하며 2012년에 천주교로 개종했습니다.
    [...] 
    그 길을 이끈 것은 글쓰기였습니다. "글을 썼는데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요?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었죠." 그는 1980년대에 이미 베르겐의 가톨릭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가톨릭이 매력적이긴 했지만 개종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퀘이커교에서도 시간을 보냈지만 2012년에는 "특히 술을 끊었을 때 다른 무언가, 더 강한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가톨릭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 그는 현재 세 번째 아내인 안나를 만났고, "그녀의 가족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신자로서 행동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959년 노르웨이 서부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포세는 일곱 살 때 치명적일 뻔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포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분신인 아슬은 그의 이야기 모음집인 <어린 시절의 장면>(1994)과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셉톨로지>(2021)에서 동일한 사고를 겪습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넘어져 많은 피를 흘린 것 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호합니다. 포세에게 자세한 내용을 물었더니 그는 의자에 몸을 움찔거립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요."라고 그는 말합니다. "피를 많이 흘렸고 죽기 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가까운 경험도 했어요. 반짝이는 빛을 보았는데 매우 평화롭고 아름다웠어요. 이 경험이 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아마도 저를 작가로 만든 것 같아요."

    20살에 포세는 대학 글쓰기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제가 당연한 우승자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업적을 다소 긴장한 듯 강조하지만, 소설 3부작으로 북유럽 문학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서는 "노벨상을 제외하고는 가장 중요한 상"이라고 설명합니다.포세는 첫 소설인 『빨강, 검정』(1983)이 출간되었을 때 아직 학생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그의 모든 소설의 특징인 매우 반복적이고 리드미컬한 산문으로 쓰였는데, 출판사는 "제 생각에는 절반으로 줄이자고 설득했습니다. 다음 소설이 출판되면 내 말만 듣기로 결심했습니다."[...]

     

     

     

     

     

     

     

    ② 노벨상 수상연설

     

    중학교에 다닐 때 예고도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선생님이 큰 소리로 읽어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갑자기 두려움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마치 제가 두려움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았어요.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뛰쳐나갔습니다.
    교실 밖으로 나가는 저를 따라오는 학생들과 선생님의 큰 눈망울이 보였습니다.그 후 저는 화장실에 가야 한다고 말하며 제 이상한 행동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제 말을 듣는 학생들의 얼굴에서 제 말을 믿지 않는 표정을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아마 제가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네, 미쳐가는 중이라고요.


    소리 내어 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용기를 내어 선생님들께 큰 소리로 읽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고, 어떤 분들은 제 말을 믿고 부탁을 그만두었고, 어떤 분들은 제가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다리를 잡아당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 사람에 대해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서 청중에게 낭독을 할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일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두려움 없이요.무엇을 배웠나요? 말하자면 두려움이 제 언어를 빼앗아갔고,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셈이죠.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다른 사람이 아닌 제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저는 저만의 글, 짧은 시, 단편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려움과는 정반대의 안전감을 느끼게 되었죠.

    어떤 의미에서 저는 제 안에 저만의 공간을 발견했고, 그 공간에서 저만의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In a way it was as if the fear took my language from me, and that I had to take it back, so to speak. And if I were to do that, it couldn’t be on other people’s terms, but on my own. I started to write my own texts, short poems, short stories.
    And I discovered that doing so, gave me a sense of safety, gave me the opposite of fear.
    In a way I found a place inside myself that was just mine, and from that place I could write what was just mine.


    약 50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여전히 앉아서 글을 쓰고 있으며, 솔직히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잘 알지 못하는 제 안의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Now, about fifty years later, I still sit and write – and I still write from this secret place inside me, a place I quite honestly don’t know much more about other than that it exists.

    노르웨이 시인 올라브 하우게(Olav H. Hauge)는 글을 쓰는 행위를 어린 시절 숲에 나뭇잎 오두막을 짓고 그 안으로 기어 들어가 촛불을 켜고 앉아 어두운 가을 저녁에 안전함을 느끼는 것에 비유하는 시를 썼습니다. 저 역시 글쓰기라는 행위를 경험하는 좋은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저는 더 많은 것을 배웠고, 적어도 저에게는 구어와 문어, 또는 구어와 문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구어는 흔히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단선적인 메시지 전달이거나 설득이나 확신을 담은 수사적 메시지 전달인 경우가 많습니다. 

    문학적 언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글과 모든 종류의 설교는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분명히 서로 대조됩니다.

    소리 내어 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의  로움 속으로 들어갔고, 그 이후로 계속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Through the fear of reading aloud I entered the loneliness that is more or less the life of a writing person – and I’ve stayed there ever since.

    저는 산문과 드라마를 모두 많이 썼습니다. 물론 드라마의 특징은 대화, 대화 또는 종종 말하려는 시도, 독백이 있을 수 있는 것은 항상 상상의 세계이며,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존재하고 존재하는 무언가의 일부인 서면 연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산문의 경우, 미하일 바흐친은 표현 방식, 즉 말하는 행위 자체에 두 가지 목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 옳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말하는 사람, 글을 쓰는 사람의 목소리와  그리고 그 글에서 언급되는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이들은 종종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중으로 쓰여진 목소리가 되며, 물론 그것은 글의 세계와 그 안의 논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제가 쓴 작품 하나하나가 저만의 허구적 세계, 저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희곡마다, 각 소설마다 새로운 세계가 존재하죠. 하지만 저도 시를 많이 써왔기 때문에 좋은 시 역시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며, 주로 자기 자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사람은 시라는 우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네, 그것은 의사 소통이라기보다는 친교에 가깝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쓴 모든 글에 해당되는 말일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를 표현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글을 써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극작가가 되었다는 것

    - 네, 그것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소설과 시를 썼고 연극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노르웨이의 새로운 드라마를 더 많이 쓰기 위한 공공 자금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가난한 작가인 저에게 연극의 오프닝 장면을 쓸 수 있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제안했고 결국 제 첫 번째이자 여전히 가장 많이 공연되는 연극인 '누군가가 올 거야'를 쓰게 되었기 때문에 연극을 쓰게 되었죠.

    제가 처음으로 희곡을 쓴 것은 작가로서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놀라움이었습니다. 산문과 시 모두에서 평소에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글로 쓰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노벨상 수상의 이유로 주어졌습니다. 자크 데리다의 명언을 비틀어 말하자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로 할 수 없고 글로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죠. The most important thing in life cannot be said, only written, to twist a famous saying by Jacques Derrida. 그래서 저는 침묵의 연설에 언어를 주려고 노력하니다 .So I try to give words to the silent speech.
    그리고 드라마를 쓸 때는 산문이나 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침묵의 연설, 침묵하는 사람들을 사용할 수 있었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은 '멈춤'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뿐이었고 침묵의 연설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드라마에서 쉼이라는 단어는 긴 쉼, 짧은 쉼, 그냥 쉼 등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멈춤에는 너무 많은 것이 있을 수도 있고 너무 적은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말로 할수 없는 무엇 , 말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 아무말도 하지 않아야  가장 잘 말해지는 것등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멈춤을 통해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은 침묵이라고 확신합니다.
     That something cannot be said, that something doesn’t want to be said, or is best being said by saying nothing at all. Still, I’m fairly certain that what speaks most through the pauses is silence.


    제 산문에서 모든 반복은 아마도 제 드라마에서 쉼표가하는 것과 비슷한 기능을 할 것입니다. 또는 희곡에 침묵의 연설이 있다면 소설에는 문어 뒤에 침묵의 언어가 있고, 좋은 문학을 쓰려면 이 침묵의 언어도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셉톨로지>에서 첫 번째 아슬과 다른 아슬이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12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소설 전체가 어쩌면 추출된 한가지를 글로 쓴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의 연설, 즉 침묵의 언어는 대부분 작품의 전체에서 말해줍니다. 소설이든 희곡이든 연극 작품이든 중요한 것은 부분 자체가 아니라 모든 디테일에 담겨야 하는 전체성이며, 어쩌면 감히 전체성의 정신, 어떻게 보면 가까이서 멀리서 말하는 정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귀를 기울이면 무엇이 들리나요? 침묵이 들립니다. You hear the silence. 그리고 말했듯이 침묵 속에서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요.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서 극장을 위해 글을 쓰면서 느낀 또 다른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글쓰기는 외로운 직업이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길이 열려 있는 한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쓴 작품이 무대에서 공연되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 저를 사로잡은 것은 외로움과는 정반대로, 예술을 공유함으로써 예술을 창조하는 동행이었으며, 그것은 저에게 큰 행복과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이 통찰은 그 후로도 저를 따라다녔고, 제가 평화로운 영혼을 가지고 단순히 버티는 데 그치지 않고 제가 만든 연극의 형편없는 작품에서도 일종의 행복을 느꼈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연극은 정말 큰 경청의 행위입니다. 연출가는 텍스트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배우들은 서로에게, 연출가는 배우에게, 관객은 공연 전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글을 쓸 때 저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으며 경청하면서 글을 진행합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행위를 비유하자면 '듣기'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글쓰기가 음악을 연상시킨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10대에 저는 음악에만 몰두하다가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글쓰기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음악을 직접 연주하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을 완전히 중단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고, 연주할 때 경험한 것을 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조금 이상한 점은 글을 쓸 때 어떤 시점에서 항상 텍스트가 이미 작성되어 있고 내 안이 아니라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이 들며 텍스트가 사라지기 전에 적어두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나는 아무런 변경없이 할 수 있고, 다른 경우에는 텍스트를 다시 쓰고, 자르고, 편집하여 텍스트를 검색하고, 이미 작성된 텍스트를 조심스럽게 꺼내려고 노력해야합니다.
    Something else, perhaps a bit strange, is when I write, at a certain point I always get a feeling that the text has already been written, is out there somewhere, not inside me, and that I just need to write it down before the text disappears.
    Now and then I can do it without making any changes, at other times I have to search for the text by rewriting it, cuttingand editing, and carefully try to bring out the text that has already been written.

    연극을 쓰고 싶지 않았던 저는 결국 15년 정도 그 일만 하게 됐어요. 그리고 제가 쓴 연극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기도 했고요, 네, 여러 나라에서 많은 공연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인생은 정말 믿기지 않아요.
    노벨 문학상 수상과 관련하여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서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소 상식적인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요.
    그리고 제가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제가 알기로는 제 드라마와 산문 모두와 관련이 있습니다.

    수년 동안 거의 희곡만 써오다 갑자기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드라마를 그만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습관이 되었고, 마거리트 뒤라스처럼 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글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 되었기 때문에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기 전 10여 년 동안 해왔던 방식대로 산문과 다른 종류의 글을 쓰기 위해 모든 것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지난 10-15년 동안 해온 일입니다. 다시 진지하게 산문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제가 여전히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어요. 처음에 삼부작을 썼고, 그 소설로 북유럽 문학상을 받았을 때 산문 작가로서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 후 『셉톨로지』를 썼어요. 그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작가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경험했는데, 예를 들어 한 애슬이 눈 속에 쓰러져 있는 다른 애슬을 발견해 목숨을 구하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또는 주인공인 첫 번째 아슬이 가장 친하고 유일한 친구인 아슬레이크와 함께 낡은 어선인 보트를 타고 마지막 여행을 떠나 아슬레이크의 여동생과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결말도요.

    긴 소설을 쓸 계획은 없었는데 소설이 어느 정도 저절로 쓰이다 보니 긴 소설이 됐고, 모든 것이 바로 맞을 정도로 매끄러운 흐름으로 많은 부분을 썼습니다.
    그때가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가장 가까웠던 것 같아요.
    셉톨로지 전체에는 제가 쓴 다른 많은 작품들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 안에 있습니다. 소설 전체에 마침표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발명품이 아닙니다. 마침표가 필요 없는 하나의 흐름, 하나의 움직임으로 그렇게 소설을 썼을 뿐입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기도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글로 읽었을 때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나중에 프란츠 카프카도 같은 말을 했다는 글을 읽고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첫 번째 책에 대한 평이 좋지 않았지만 비평가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제 자신을 믿고 제 글에 충실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하지 않았다면 40 년 전에 데뷔 소설 인 Raudt, svart ( "Red, Black")가 나온 후 글을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저는 대부분 좋은 평가를 받았고 상도 받기 시작했는데, 그때 저는 같은 논리로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나쁜 평가를 듣지 않으면 성공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가 만든 것을 붙잡고 붙잡고 매달릴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해왔고, 노벨상을 받은 후에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이 발표되었을 때 많은 이메일과 축하 인사를 받았는데, 물론 저도 매우 기뻤고, 대부분의 인사는 단순하고 유쾌한 것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기쁨에 비명을 지르고,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썼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제 글에는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요. 이런 식으로 제가 자살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 것은 아닌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저를 감동시킨 것은 제 글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솔직하게 글을 써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글쓰기가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알고 있었고, 어쩌면 제 자신의 생명도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 글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해 주신 스웨덴 한림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신께도 감사드립니다.

    메이 브릿 아커홀트 번역

     

     

     

    ③ 침묵과 성찰의 공간: 욘포세(Jon Fosse)와 인간존재의 깊은 탐색

     

    홍재웅(한국외국어대학교 스칸디나비아어과 교수)

     

    [...] 

    포세의 쓰기

     

    시간을 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다소 억지스럽게 들릴지 모르겠다. 사실 현대인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이 현대인의가장 큰 문화적 두려움일 수 있다. 그렇지만우리가‘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왜 존재하는지 오랫동안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명상적 혹은 성찰의상태, 즉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에서 자유로운 상태는 내면의 평온을 추구하고, 현대사회에서의 지속적인 자극과 생산성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려는욕구와 연결된다.

     

    포세의 쓰기에서 침묵의 공간과 언어는 인간 존재의근본적인 질문을 탐구하고, 복잡한 인간 감정을 표현하는 중심적인 요소이다. 포세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말할 수 없는 것들이 갖는 깊은 의미와 감정을 탐색한다. 이를 통해 그는 독자나 관객에게 깊은 사유와 감정적 공감을 끌어내는 작품을 창조한다. 이 과정에서 포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감정과 생각들을 비언어적 수단을 통해 탐구하며,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의 복잡한 내면세계와 인간관계의 섬세한 층위를 드러낸다

     

     

    포세의 쓰기는 이러한 복잡한 주제들을 섬세하고 강렬하게 탐구하며, 현대 문학과 극작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포세는 그의 독특한 문체와 구조적 혁신을 통해, 전통적인 서사 방식을 넘어선 새로운 문학적 공간을 창조해내 , 독자와 관객이 자신만의 내면적 여정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포세는 작품을 통해 우리가 현대 사회의 도전과 문제를 넘어서서 인간 존재의 더 근본적이고 씁원한 가치를 탐구하는 여정에 동참하게 만든다. 그의 쓰기는 독자와 관객에게 삶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다시 묻게 하며, 내면의 평화와 이해를 추구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다시 말해서 포세의 작품은 현대 사회와 기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탐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기술과 물질주의에 의존하는 삶 속에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잊지 않고, 자기 내면과 영적 존재에 대해 깊 이 고민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함을 상기시킨다. 포세의 작품은 이러한 성찰의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독자와 관객이 현대세계의 복잡함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탐색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결국 포세의 작품에서 언어와 침묵의 사용은 단순한 서사 기법을 넘어서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탐구와 심오한 인간적 경험의공유로 이어집니다. 그의 쓰기는 인간이 마주하는 내면의 싸움, 외로움, 그리고 타인과의 깊은 연결에 대한 갈망을 탐색하며,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을 끌어낸다.포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인간 본성의 복잡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상기하게 된다.

     

     

    ‘느림’과‘침묵’의 미학 -  현대의 과학의 발전과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행해지는 기계문명의 빠른 속도와 다양한 정보 홍수, 소음, 분노. 사회를 전복하는 자극기제가 됨

                                      

    침묵의 미학적 글쓰기- 단순히 무(無), 즉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잠재성이 가장 충만한 세계,‘보이지 않는 것’, 그 무엇인가를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잠재성’의 이론으로 나아감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통해 비어있는 무대에서 역설적으로 비가시적인 내면의 떨림을 지각할 수 있다.
     현실태의‘중지’속에서 비로소 잠재성의 본질이 드러남

    ‘닫힌 텍스트geschlossene Texte’7)-  사적(私的) 관계에 속하는 인물들
    이름 대신 ‘그 He’, ‘그녀 She’ 등의 인칭대명사나 ‘남자’, ‘여자’, ‘나이 든 남자 The Older Man’, ‘나이 든 여자 The Older Woman’, ‘소년’,‘소녀’ 등 인물을 일반화한 호칭, 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등 가족관계 속의 호칭으로 ‘유사성’과 ‘연관성’을 가지며 반복적으로 등장

     

    ④ 피오르 바닷가 마을이 세계적 문학이 되다

     

    https://nzine.kpipa.or.kr/sub/report.php?ptype=view&idx=797&page=$page&code=report

     

    [...] 

    포세는 비인칭의 글쓰기를 시도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이름, 직업, 나이 등이 모두 명시되어 있지 않고, 인물의 과거 또한 독백이나 대화를 통해서 슬쩍 드러날 뿐 특별히 설명되지 않는다. 포세는 말한다. “나는 노동자 또는 회사원으로서 그들의 삶에 관해 쓰지 않는다. 나는 인물에게 이름과 직업, 그리고 전기적 배경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나는 그 남자 또는 그 여자로서의 인물을 원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한 사람이 인생에서 겪는 여러 가지 사건들의 의미가 아니다. 그는 인간 전체가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삶의 공백을 탐구한다. 그것은 이름과 지위와 사건을 지워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아슬레는 사랑하는 연인과 살림을 꾸려 행복하게 살면서도, 때때로 바다의 목소리를 들으려 쪽배를 타고 물결에 몸을 싣는 것이다.

     

    [..]

     

    삶이란 냉대와 배신으로 얼룩진 오욕의 연속이고, 누추하고 추악한 고통의 악순환이다. 게다가 우리는 아슬레처럼 항상 존재의 결핍, 근원적 고독에 시달린다. 이러한 삶에서 포세는 만연한 어둠에 지지 않는 한 줄기 빛을, 영혼의 평화를 탐구한다. 한 문학 비평가는 말한다. “포세가 소설을 말할 때 사용하는 핵심 단어가 평화다. 일이 일어나고, 사람이 죽고, 이혼하나, 그 안에는 진정한 평화가 깃들어 있다.” 『셉톨로지』와 함께 노르웨이 피오르 해안 마을에서 언어의 어부가 건져 올린 존재의 평화를 맛볼 날을 기대한다.

     

     

    모임운영: 이승은

      
    • 서강대학교 독어독문학 박사 (독일여성문학 전공)   
    •  (前) 서강대학교 독문과 강사.   
    •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과정 문학 담당 교수.   
    •  (前) 김포대학교 국제교류처 한국어과정 강사.  
    •  한겨레문화센터 <Herstory: 여성문학 북클럽> 강사.   
    •  <페미니즘 함께 읽기> <Herstory 여성문학 북클럽> 모임 운영.(숭례문학당)   
    •  (前) 청소년 대상 <책을 통해 자라는 아이들> 독서토론 강사.   
    • 우장산숲속도서관 <페미니즘 함께 읽기> 강사.   
    • 우장산숲속도서관<재난과 불안의 시대, 인문학으로 치유하다> 토론 강사  
    • <여성문학 읽기> 토론 모임 운영 
    • 대안연구공동체
      <문학에세이 쓰기> 진행중 https://cafe.naver.com/paideia21/16652


    • 출간 작품   
      『아버지의 덫』, 『공모자들』, 『행복한 엄마가 행복한 아이를 만든다』 등 다수의 번역서 출간.   
      『글쓰기로 나를 찾다』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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