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 - 제인 오스틴 지음, 이미경 옮김/시공사 |
18세기 영국 시골 마을에서 마흔두 해 짧은 생을 살다 간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건 매우 경이로운 일이다. 남녀의 성 역할, 사회적 지위, 돈, 결혼, 그리고 사랑까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담긴 다양한 주제는 200년 전 햄프셔의 작은 마을에 살았던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우리네 삶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요소들이다. 곧 이 위대한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꼭 200년이 된다. 부디 이 책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받아 다음 200년간도 유효한 고전으로 남게 되길 바란다.
2017년 제인 오스틴 사후 200주년을 앞두고 시공사에서 국내 최초로 출간한 '제인 오스틴 전집'. 정확하고 감각적인 번역으로 원작의 묘미를 살리고, 독자들이 보다 편히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당대 영국의 관습과 표현 등은 충실한 주석을 달아 보완했다. 이에 더해 영국 문화를 알리는 가장 공신력 있는 기관인 주한영국문화원의 추천을 받았다.
<설득>은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장편소설로 <노생거 수도원>과 함께 사후인 1817년에 출간되었다. 죽음을 1년여 앞두고 쓴 작품답게, 사랑하는 두 남녀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합에 이르는 낭만적인 과정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비교적 차분하고 성찰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주인공인 앤 엘리엇은 분별 있지만 소심하고 자기주장에 서툰 여성으로, '재산도 지위도 없는 청년'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반대에 '설득'되어 연인과 헤어졌다가 8년 만에 그와 재회한다. 준남작의 딸이라는 허울 좋은 배경을 갖고 있지만 실상 이렇다 할 재산도 미모도 없이 (당시로서는 노처녀에 가까운) 스물일곱 살이 되어버린 앤과, 그사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신랑감이 되어 돌아온 옛 사랑.
엇갈리고 뒤바뀐 두 사람의 모습에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의 아이러니와 함께 당대의 결혼 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본 오스틴의 냉정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여성의 자존감은 제인 오스틴의 발명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가디언]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으로, 이십 대 후반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채 가족들의 무관심과 소외 속에 삶을 꾸려 가는 여성의 모습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 낸 이 소설은, 제인 오스틴의 다른 소설들과 함께 현대까지도 여성의 삶에 대해 의미 있게 고찰할 수 있는 고전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제인 오스틴 (Jane Austen)
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 주 스티븐턴에서 교구 목사의 딸로 태어났으며 8남매 중 일곱째였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에 심취했던 그녀는 10대부터 꾸준히 습작 활동을 한다.
1793년, 서간체 단편 소설인 『수잔 부인(Lady Susan)』을 집필하기 시작해 1795년에 완성한다. 같은 해에 집필한 『엘리너와 메리앤(Elinor and Marianne)』은 훗날 『이성과 감성(Sense and Sensibility)』으로 개작된다. 그녀는 1796년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남자 측 집안의 반대로 무산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첫인상(First Impressions)』(1797)을 완성해 런던의 한 출판사에 가져갔으나 거절당한다. 훗날 이 작품은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1813)으로 개작되어 출판된다.
이 무렵 『이성과 감성』과 『오만과 편견』은 큰 인기를 얻어 매진 후 재판 인쇄에 들어간다. 연이어 『맨스필드 파크(Mansfield Park)』(1814)와 『엠마(Emma)』(1815)가 출판되는데, 이 작품들 역시 매진 사례를 기록한다. 1817년, 그녀는 『샌디션(Sandition)』을 집필하기 시작한 후에 건강이 악화된다. 결국 그녀는 1817년 7월 18일,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오스틴 소설이 다루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인 사랑과 결혼, 부에 대한 강박, 사회계층적 추락에 대한 공포, 이성과 신중함의 미덕 등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다. 감정의 거품을 거부하는 소설 속 캐릭터들이 19세기가 아니라 지금 현재 세계에 옮겨놓아도 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시간을 초월하는 현대성을 갖고 있다는 점 역시, 자유로운 재해석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오스틴 소설 속 주인공 엘리자베스, 엠마, 패니, 엘리노어 등은 모두 좋은 남자들과 행복한 결혼을 하지만 결코 신데렐라가 아니다. 그들이 남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미모도, 돈도, 사회적 지위 덕분도 아니며 오로지 현명함과 인내심,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의 소중함을 알아볼 줄 아는 마음가짐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유머감각과 재치마저 가지고 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제인 오스틴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인 오스틴의 설득에 드러난 상대적 가치의 세계
- 흔들리지 않는 앤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오스틴은
삼인칭 서술이라는 형식을 이용한 기법들을 시도했다.
[1] 자유 간접화법
- 외부로 드러나는 것이 불가능한 심리상태를 펼쳐 보이는 전략 중 하나로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을 들 수 있는데,
서술자라는 매개를 거치고 있음에도
서술자가 개입하지 않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콘(Dorrit Cohn)은 “삼인칭과 서술의 기본 시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while maintaining the third-person reference and the basic tense of narration)
서술자의 언어로 등장인물의 생각을 “번역”(translate)할 수 있는 기술을 자유간접화법이라고 설명한다
- 이러한 번역의 가장 큰 이점은 외부적 요소를 끌어들이지 않고 서술의 언어 내에서 내면성을 드러냄으로써, “개인의 성격”(private personality)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이고 상대적인 요소를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McKeon 705).
ex) 설득에서는 앤의 내면적 격동을 묘사하기 위해 자유간접화법이 사용되곤 하는데, 바스의 콘서트홀에서 엘리엇과 웬트워스를 동시에 마주친 앤이 웬트워스의 진심을 깨닫는 장면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 엘리엇 씨에 대한 질투! 그것만이 이해할만한 동기였다. 웬트워스 대령이 그녀의 애정에 대해 질투하다니! 일주일 전이었다면―세 시간 전이었다면 그녀가 이를 믿을 수 있었을까! 잠시 동안이지만 강렬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아! 전혀 다른 생각이 바로 이어졌다. 어떻게 그 질투를 가라앉힐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그에게 진실이 도달하게 할 것인가?
Jealousy of Mr. Elliot! It was the only intelligible motive. Captain Wentworth jealous of her affection! Could she have believed it a week ago—three hours ago! For a moment the gratification was exquisite. But alas! there were very different thoughts to succeed. How was such jealousy to be quieted? How was the truth to reach him? (Austen 154)
웬트워스가 실제로 엘리엇을 질투하고 있는 것인지, 앤에 대한 그의 마음이 진정 달라진 것인지를 이 순간에 실제로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앤의 내면이 주관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삼인칭 서술자의 언어로 전달됨으로써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처럼 드러나기 때문이다. 묘사된 내면세계는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영역이지만 이를 전달하는 삼인칭 서술은 “공적으로 유통된다는 비개인성”(impersonality of public circulation)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McKeon 705), 자유간접화법을 통해 상대성과 절대성의 일시적 합치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서술자의 언어는 내면세계와 외부를 매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로 인해 서로 상반되는 것 같은 상대적 가치와 절대적 가치가 미묘한 상관관계에 놓이게 된다.
[2] 삼인칭 효과
등장인물의 내면세계가 서술의 매개를 거쳐 전달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삼인칭 효과(third-person effect)를 들 수 있다. 맥키언은 가정 소설에서 편지라는 소재가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분석하면서, 편지의 내용과 그 편지를 읽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교차하여 제시함으로써 “객관성과 내면성”(detachment and interiority)이 동시에 전달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699-700). 편지에 사용된 언어 라는 주어진 상황과 이 상황을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인물의 내면적 움직임이 이러한 효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설득에는 편지를 읽는 앤의 모습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이외에도 삼인칭 효과에 부합하는 또 다른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McKeon, Michael. The Secret History of Domesticity: Public, Private, and the Division of Knowledge.
[3] 제삼자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는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작품의 후반부에 서 머스그로브 부인과 크로프트 부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앤과 웬트워스가 동석하게 되고, 이어지는 앤과 하빌 대령(Captain Harville)의 대화를 웬트워스가 듣게 되는 장면을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머스그로브 부인에게서 헨리에타(Henrietta)의 결혼 소식을 전해들은 크로프트 부인은 약혼 기간이 길거나 불확실하게 이어지는 것은 “안전하지도 현명하지도 않다”(unsafe and unwise)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히며 빠른 결혼을 축하한다(Austen 186). 이 말을 들은 순간앤은 무의식중에 웬트워스를 바라보게 되고, 그가 편지를 쓰던 손을 멈춘 채 “잽싸고도 의식적 눈길 한번”(one quick, conscious look)을 자신에게 보내는 것을 목격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앤은 남성과 여성 중 누가 먼저 사랑을 잊는가를 주제로 하빌 대령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남성이 강건한 신체를 가진 것처럼 기억도 더 강하다는 하빌 대령의 말에, 앤은 “존재나 희망 자체가 사라졌을 때에도”(when existence or when hope is gone) 사랑을 계속하는 것이 여성의 특권이라 말한다(189). 편지를 쓰는 척하며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웬트워스는 앤이 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그녀의 마음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맥키언은 삼인칭 효과가 극대화되면 편지라는 지극히 외적인 언어를 통해 “[글쓴이의] 동기와 감성이라는 윤리적 자질”(ethical quality of[writers’] motives and sensibilities)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700). 위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자면, 앤과 웬트워스의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르는 두 부인이 나누는 대화는 편지에 쓰인 글과 마찬가지로 객관적 거리감을 부여한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밀려드는 감정은 인물의 윤리적 자질을 엿보게 해주는 진정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웬트워스가 앤의 진심을 깨닫는 순간 쓴 편지는 이 작품에서 삼인칭 효과를 자아내는 원인이라기보다는 결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생각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오스틴은 재현의 초점을 외재적 가치에서 내면적 진정성으로 이동시킨다.
여러 비평가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작품에서는 앤이 가치 판단의 구심점으로 삼을 수 있을만한 외부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전미경 35). 이러한 진공상태를 해결해줄만한 준거를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삼인칭의 서술이 제시하는 객관적 거리감과 이를 통해 앤의 내면세계에 부여된 권위일 것이다. 그결과, 그녀가 엘리엇과의 결혼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감성의 문제일 뿐 아니라 윤리적인 결정으로 고양되기에 이른다. 엘리엇이 월터 경 주변을 맴도는 이유가 앤 때문이라 생각한 러셀 여사는 대녀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켈린치 홀이라는 매력적 조건을 제시한다. “더 가치 있게 여겨진다는 점에서만 나을 뿐, 네가 [너의 어머니]와 같은 상황에서, 같은 이름을 쓰고, 같은 집에 머물며, 같은 곳에 축복을 내리게 되리라 상상할 수만 있다면!”(ifI might be allowed to fancy you such as [your mother] was, in situation, and name, and home, presiding and blessing in the same spot, and only superior to her in being more highly valued!)이라는 러셀 여사의 말에 앤은 잠시 동안 “넋이 나간 듯한”(bewitched) 만족감을 경험한다(Austen 130). 그녀가 이처럼 황홀하기 그지없는 환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웬트워스에 대한 감정이 지극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자”(on a serious consideration of the possibilities of such a case) 엘리엇을 결혼상대자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130). 엘리엇과의 결혼이 이미 결정된 것이라 생각했던 스미스 부인은 “모든 세속적인 문제와 평판이라는 측면에서는 안전할”(safe in all worldly matters, and safe in his
character) 것이라며 친구의 앞날을 축복한다(158). 그러나 앤은 이러한 외면적 조건 대신 내재적 가치를 선택했고, 그 결과로 내려진 판단에는 도덕적, 감정적 타당성이라는 권위가 부여된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면성이 절대적이고 객관적 가치 체계처럼 작동한다는 점에서, 오스틴의 소설에 대한 푸비의 논의를 한 번 더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가치의 불확실성이라는 당대의 사회경제적 문제가 외재적, 상대적 가치 판단과 내면세계라는 구도를 통해 재현되는 동시에 삼인칭 서술이라는 미학적 전략으로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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