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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 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by 책이랑 2024. 9. 6.

서양 예술과 철학의 근본 정조, ‘멜랑콜리Melancholy’
멜랑콜리의 관점에서 새로 쓰는 서양문화사!


미래의 멜랑콜리는 어떤 변용 과정을 겪게 될 것인가?
서양적 멜랑콜리는 어떻게 보편성을 확보하며 새롭게 재정립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는 멜랑콜리보다 훨씬 더 깊은 슬픔의 샘에서 참된 희망과 생명을 길어올릴 채비가 되었는가?

서양적 자기정체성의 원형은
자기애自己愛에 사로잡힌 나르키소스와 자기가 창작한 대상에 사로잡힌 피그말리온이다. 두 인물 모두 서양문화를 상징하는 멜랑콜리커(멜랑콜리 기질의 소유자)다. 멜랑콜리가 빚어낸 서양철학의 네 역사적 국면을 “실체實體, 일체一體, 주체主體, 매체媒體”의 4체로 규정하는 저자는 서양적 멜랑콜리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서양문화의 한복판에 선 동양인의 눈으로 서양적 한계를 돌파하는 미래의 멜랑콜리를 구상한다.

‘검은 담즙’의 수수께끼 ― 서양의 멜랑콜리 담론사


“서양문화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2,500년 동안 ‘멜랑콜리 정조’에 물들어 있었다.” 지난 10여 년간 멜랑콜리 담론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 김동규는 전작 『멜랑콜리 미학 - 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문학동네, 2010)에서 영화 <글루미 선데이>를 안내자 삼아, 사랑과 죽음이라는 보편적 멜랑콜리의 지평에서 예술과 철학을 조망한 바 있다. 이번 책 『멜랑콜리아―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는 『멜랑콜리 미학』의 후속편으로서, 멜랑콜리 담론을 학문적으로 집대성한 저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멜랑콜리를 서양문화의 특이성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한계 및 한국적 변용 과정을 고찰한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첫째, 지금까지 진행된 서양의 ‘멜랑콜리’ 담론을 철학적으로 재구성하고, 둘째, 멜랑콜리라는 코드로 읽힌 서양문화의 기본 얼개와 그 한계를 보여주며, 셋째, 멜랑콜리한 서양문화를 우리가 어떻게 수용하고 변용했는지를 성찰하는 것이다. 특히 서양 멜랑콜리의 한계와 그 한국적 변용에 대한 논의에서는 박동환, 김상환, 김상봉 같은 우리 철학자와 한용운, 이성복, 기형도, 진은영 같은 우리 시인들이 주요한 텍스트로 다루어진다.

멜랑콜리란 무엇인가?

처음에 멜랑콜리는 고대 서양의학 용어였다. 어원적으로는 그리스어 멜랑콜리아에서 유래하는데, ‘검다’는 뜻의 멜라스와 ‘담즙’이란 뜻의 콜레가 합쳐진 말이다. 즉 멜랑콜리는 ‘검은 담즙’을 뜻한다. 고대 의학에서는 인간의 몸 안에 네 가지 체액(혈액, 노란 담즙, 검은 담즙, 점액)이 존재하며, 이 체액에 따라 사람의 체질과 기질이 정해진다고 보았다. 이 가운데 검은 담즙은 ‘우울과 슬픔에 젖는 기질’에 해당한다.

서양에서는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의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멜랑콜리를 예술과 철학을 해명하는 핵심어로 파악해왔다. 멜랑콜리 담론은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아퀴나스, 피치노, 칸트, 헤겔,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프로이트, 벤야민, 크리스테바, 데리다, 버틀러, 지젝 등 줄기차게 이어져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한 철학자들인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니체, 하이데거는 멜랑콜리를 철학적 용어로 사용하며, 프로이트는 멜랑콜리의 근저에 나르시시즘이 자리하고 있음을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사유하며 이를 이어받은 크리스테바, 데리다, 버틀러, 지젝은 다양한 문맥(예술, 정치, 문화, 성 담론)에 멜랑콜리를 접속시킨다. 또한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는 도상학의 관점에서 탁월한 멜랑콜리론을 내놓았다. 이 책 앞에 수록한 화보를 보면, 얀스, 뒤러, 라그르네, 고흐, 로댕, 뭉크 등 서양 예술작품에서 ‘멜랑콜리 포즈’가 얼마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도상들은 멜랑콜리한 서양적 정체성을 반영한다.
서양의 인문학 담론사에 출현한 멜랑콜리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 그리스에서 표출된 비극적 영웅의 멜랑콜리, 중세인들이 ‘아케디아(나태)’와 결부지어 죄악시하던 종교적 멜랑콜리, 근대적 주체의 강박적 멜랑콜리, 그리고 현대에 익명화되고 파편화된 개인의 고독한 멜랑콜리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예술의 비밀을 해명하는 데 멜랑콜리가 자주 애용되었다. 플라톤이 말한 시인의 신적 광기를 멜랑콜리로 해석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양에서는 예술가를 멜랑콜리커로 이해했다. 즉 멜랑콜리는 신적인 광기, 영감, 천재로 이어지는 자유로운 창작자의 정조로 파악되었다.

서양문화는 멜랑콜리라는 요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그런데 멜랑콜리는 서양인들에게 천당이자 지옥이다. 멜랑콜리는 자유롭고 풍요롭고 안락하기까지 한 (그렇기에 탈출할 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감옥이다. 한때 그들을 자유롭게 한 그 문화가 현재는 그들을 옥죄는 감옥이 된 셈이다. 서양인들은 자유인의 그 달콤한 멜랑콜리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른다. 주지하다시피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대 서양 철학자들은 과감하게 전통의 토양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그들 역시 멜랑콜리라는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했다.(33-34쪽)

배타적 자기애의 세계가 빚어낸 검은 정조


그동안 서양 문화와 철학을 지배해온 태도는 자기중심적 존재론과 철저한 동일성의 논리다. 이런 “배타排他로 직조된 자기애의 세계”(447쪽)가 서양철학의 몸체를 이룬다. 서양인들은 타자성을 모르지 않았으나 이를 무시했다. 지독한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서양인들에게 타자는 기껏해야 이국적 취향이나 인식의 ‘대상’에 불과했다. 아니면 의식과 인식의 배후에서 인식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프로이트의 ‘이드’, 칸트의 ‘물자체’) 그것도 아니면 불멸의 신이나 절대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멜랑콜리는 이러한 자기 내부의 타자성이 뿜어내는 서양문화의 근본 정조다. 멜랑콜리는 몸으로 상징되는 타자성을 고착된 자기 안에 가두려는 욕망에서 유래한 고통이다. 하지만 이 멜랑콜리는 (예술과 문화) 창조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서양적 멜랑콜리는 빛나는 문화유산과 과학기술을 인류에게 남겨주었지만, 그 서양적 세계에는 타자, 이방인, 주변자를 위한 공간이 없다. 그곳에는 중심으로의 철저한 편입과 동화만이 허용다. 서양의 문화와 철학뿐 아니라 현실 역사도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멜랑콜리는 서양 엘리트의 특권적 정조다. 즉 자유로운 지성인과 지배층의 정조다. 서양의 주류문화 또는 지배문화에서 멀어질수록, 주변부나 하위문화로 접근할수록, 멜랑콜리는 점점 색이 바랜다.

멜랑콜리 4체론


저자 김동규는 고대의학의 4체액설에 빗대 서양철학사를 ‘멜랑콜리 4체론’으로 새롭게 규정한다. 여기서 단일한 체질의 네 가지 양상을 뜻하는 4체란 곧 “실체實體, 일체一體, 주체主體, 매체媒體”다. 서양철학은 단일한 멜랑콜리 체질을 가지고 있으며, 4체란 그 체질의 네 가지 역사적 양상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실체實體: 서양철학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무엇임’, 곧 ‘실체’를 찾고자 했다. 어떤 것을 그 자체이게끔 해주는 무엇, 그것이 없으면 도무지 존재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실체에 대한 ‘앎의 열망philo-sophy’에서 출발했으며, 물, 불, 원자, 이데아 등이 그들이 내놓은 해답이었다. 그들은 광기어린 집요함으로 실체를 추구했다. 세계의 존재론적 지배라는 오만hybris을 금지하면서도 그 오만을 선망했던 그리스인들은 처음부터 멜랑콜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체一體: 그리스의 다신교적 헬레니즘과 유일신을 믿는 헤브라이즘을 통합하고 합리적 이성과 기독교의 신앙을 화해시키는 것이 중세 지식인들의 최대 과제이자 목표였다.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오컴 등은 이런 지평에서 하나로서의 신, 짝이 있는 상대가 아니라 홀로 있는 절대자로서의 신, 그런 존재를 사유해나갔다. 중세 서양인들은 고딕 성당의 첨탑처럼 하나의 점으로 모든 것이 수렴되는 일체의 철학을 꿈꾸었다. 이런 일체적 사유는 실상 실체적 사유를 기저에 깔고 있다. 특정한 존재자에서 확장하여 전체 존재를 하나의 실체로 확정지으려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주체主體: 데카르트는 근대를 구획짓는 물음, 즉 가장 자명하고 확실한 진리, 추호의 의심도 불허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의심의 수렁에서 그를 구한 것은 바로 그 ‘의심하고 있는 나’였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의심하는 ‘주체’인 ‘나’만큼은 더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진리였다. 이제 근대인들은 신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 칸트가 꿈꾸었던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이렇게 시작된다. 근대 이후, 인간은 신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다. 모든 것이 인간 주체를 중심으로 설명되고 해석된다. 인간의 자유와 권리, 자발성과 능동성이 이만큼이나 찬미된 시기도 없다. 그런데 서양 근대인이 말했던 인간은 엄밀히 말하면, 백인, 남성, 신흥 부르주아에 가깝다. 자유의 기치 아래 성립된 서양 근대의 주체 철학은 ‘인간(백인/이성/남성)중심주의’라는 편파적인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매체媒體: 현대인들은 근대인들이 믿었던 주체를 더이상 믿지 못한다. 의심하는 나 자신마저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구조이든 욕망이든 자본이든 다른 무엇의 대리인 또는 ‘매체’에 불과하다는 각성이 서양 현대인들을 근대철학의 꿈에서 깨어나게 했다. 이제 현대철학자들은 주체로 여겨왔던 인간 개개인마저도 무엇인가의 매체라고 바라보면서, 주체라는 환상을 생성, 조작, 변형시키는 일련의 과정에 논의를 집중한다. 그럼으로써 현대철학자들은 주체의 죽음을 선포한다. 현대인들에게 주체는 타자의 매체일 뿐이다.

위와 같은 서양철학의 4체는 서로 딴 몸이 아니다. 한 몸이 성장하면서 차례로 발현되는 네 가지 변태變態 양상이다. 그런데 이 4체에서 변하지 않고 흐르는 정조는 멜랑콜리다. 실체가 일체가 되고 주체와 매체로 변신하면서도 멜랑콜리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왜일까? 서양인들은 자기중심적 존재론과 동일성의 논리에 입각한 삶의 형식에서, 즉 나르시시즘의 세계에서 결코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멜랑콜리한 서양문화는 실체, 일체, 주체, 매체의 개념틀로 타자를 대상화시켜 인식해서 사용하고 조작하고 지배할 줄만 알았지, 타자를 진정 받아들여 또다른 타자를 낳는 ‘진정한 사랑’에는 이르지 못했다.

‘미토콘드리아의 지혜’와 미래의 철학


이 지점에서 저자는 미래 철학의 가능성을 서양의 타자이면서 서양문화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찾는다. 그리고 포식자의 내부에서 공생의 길을 열었던 ‘미토콘드리아’의 지혜를 배우자고 제안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생명의 최소 단위인 세포 내부에 있는 소기관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DNA를 가지고 있으며, 세포와는 별개로 분열을 수행한다. 여기서 착안해 린 마굴리스 같은 생물학자는 ‘세포 내 공생설’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즉 세균이 먹어치운 먹잇감(또다른 세균)이 포식자의 내부에서 우연히 살아남아 공생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원핵세포에서 진핵세포로 진화하여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먹고 먹히는 적대적 경쟁 관계조차 공생 관계를 전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서양문화의 내부, 그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동안 서양문화의 정수를 따라잡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모방하고 배웠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서양의 관점에서 이방인이고 주변인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전통 문화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미토콘드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서양에 포식된 동양이 내부 공생에 성공한다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진정한 세계철학이 탄생할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말한다.

철학의 미래는 서양의 타자인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는 철학적 결단의 갈림길에 서 있다. 서양철학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동화되느냐, 아니면 동서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철학을 창조하느냐. 기생하며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느냐, 아니면 주도적으로 공생의 지혜를 발휘하느냐.(449쪽)

그런 미래 철학을 열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저자는 세 가지를 든다. 첫째, 서양의 타자인 우리가 서양문화의 내부에서 온전히 소화/동화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는 것, 둘째, 종국에 서양문화와 끈끈한 상리공생의 길을 찾아내는 것, 셋째, 서양의 멜랑콜리 체질을 바꾸어 동서가 모두 거주할 수 있는 ‘감각의 공동체’, ‘지성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 이 세 가지 조건을 치밀하게 사유하는 도정에서 미래의 철학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책 내용

이 책은 제1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니체를 중심으로 서양에서 전개된 멜랑콜리 담론의 철학적 배경을 살펴본다. 이어 제2부에서는 하이데거와 프로이트, 그리고 한국의 철학자 박동환을 중심으로 멜랑콜리 담론의 한계를 적시한다. 끝으로, 제3부에서는 한용운, 이성복, 기형도, 진은영 등 우리의 시인들이 멜랑콜리를 수용하고 변용시킨 과정을 살펴보고 그 철학적 의미를 성찰한다.
각 부마다 논의의 줄기를 이루는 몇몇 장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장 끝에는 ‘멜랑콜리 스펙트럼’이라는 보론 형식의 글들이 있다. ‘멜랑콜리 스펙트럼’은 본론의 구멍,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멜랑콜리라는 키워드로 예술작품들을 분석해보려는 의도로 마련되었다.

제1부 멜랑콜리, 서양문화의 숨겨진 기원
1장 「멜랑콜리 담론의 출발 ―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들』에 등장하는 멜랑콜리가 이미지 창작의 원동력일 수 있는가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소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문제들』에서 제기한 중요한 화두 “철학과 정치, 시 또는 예술 방면의 비범한 사람들이 왜 모두 명백히 멜랑콜리커였을까?”를 출발점 삼아 멜랑콜리와 예술적 이미지의 내적 관계를 고찰한다.
2장 「숭고한 멜랑콜리 ― 칸트」는 서양 이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선보인 칸트 철학에서의 멜랑콜리를 살펴본다. 계몽주의자 칸트는 이성을 누구보다 신뢰하면서도 이성의 한계를 숙고했던 철학자다. 그렇기에 그는 이성과 함께 감정을 철학적 반성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런데 칸트적 이성과 연관된 숭고함은 멜랑콜리라는 어두운 정조로 채색되어 있다.
3장 「비극과 멜랑콜리 ― 니체Ⅰ」는 ‘문화는 고통을 해석하는 일종의 의미체계’라는 문화철학적 테제의 관점에서 비극에 대한 니체의 논의를 재해석한다. 비극은 무의미한 인간의 운명,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격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무의미에 대해 ‘분격’하는 대신 그것을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유도하는 예술적 장치다. 니체는 문화철학적 관점에서 고통을 대하는 두 가지 해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고통을 해석할 수 있는 유연한 의미망을 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의 파토스를 문화예술 창작의 힘으로 변용시키라는 것이다.
4장 「멜랑콜리커의 웃음 ― 데모크리토스, 버턴, 니체Ⅱ」는 서양문화에서 웃음이 어떻게 다루어져왔으며, 서양적 웃음의 성격은 어떤 것인지를 멜랑콜리와 관련지어 살펴본다. 서양적 웃음의 정체는 냉소이며, 냉소는 자기중심적 자유의 존재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서양문화의 틀 속에서 배양된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인의 냉소는 멜랑콜리의 대척점이 아니라 오히려 멜랑콜리의 아이러니이자 야누스적 모습이다.

제2부 멜랑콜리 문화의 한계
5장 「창작하는 자유인의 고뇌 ― 하이데거Ⅰ」는 어떻게 멜랑콜리가 서양문화 혹은 서양철학의 근본정조일 수 있는지를 하이데거를 통해 규명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철학은 일종의 창조이며, 창조는 세계형성을 뜻하고, 세계형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유로워야만 하는데, 여기서 인간의 자유는 일차적으로 존재에의 개방성을 뜻한다. 그런 탈존적 자유는 자기존재 전체를 거는 결단을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자유로운 창작자는 자유의 짐, 곧 묵직한 자기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창조적인 자유인의 철학인 서양철학은 무거운 심정인 멜랑콜리라는 기분 속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다.
6장 「유아론과 멜랑콜리 ― 하이데거Ⅱ」는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부에도 멜랑콜리가 자리잡고 있음을 밝힌다. 탁월한 기분 분석을 통해서 하이데거는 멜랑콜리를 통한 철학 이해의 발판을 제공해주었으며, 동시에 멜랑콜리가 철학의 근본개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이데거에게 멜랑콜리는 본래적인 현존재의 고독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고독은 한갓 심리적인 감정 상태를 기술하는 말이 아니라 하이데거가 규정한 대로 철학의 근본개념을 뜻한다. 하이데거의 자기중심적 존재론에 따르면, 현존재는 고립된 주체 내지 실체가 아니라 ‘세계-내-존재’이지만, 그 세계는 다시 ‘자기-내-존재’로 회귀한다. 하이데거의 이런 ‘실존론적 유아론’은 멜랑콜리 정조에 감싸인 서양 전통철학의 흐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7장 「서양 주체의 문화적 기질론 ― 프로이트」는 우선 프로이트의 ‘멜랑콜리론’을 (비교)문화철학적 문맥에서 재구성한다. 정상적인 슬픔이 멜랑콜리로 전환되는 내적 메커니즘을 정밀하게 분석하면서, 프로이트의 멜랑콜리론에 감추어진 서양의 철학적 전통과의 연결지점을 드러낸다. 프로이트 멜랑콜리론의 근본 전제는 ‘나르시시즘’이며, 그것은 서양의 자기중심적 존재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요컨대 프로이트의 멜랑콜리론은 서양적 주체의 ‘문화적 기질’을 밝혀주는 문화담론이다.
8장 「서양 멜랑콜리의 한계 ― 박동환·김상봉」은 멜랑콜리를 구성하는 핵심 개념, 즉 자기, 동일성, 나르시시즘을 중심으로 그것이 함축하는 철학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여기서는 서양의 주변부에 있는 우리의 철학자 박동환과 김상봉의 선행 연구를 통해서 서양철학의 한계를 엄밀하게 조망해본다. 특히 ‘자기’와 ‘동일성’ 개념은 박동환의 통찰을, ‘나르시시즘’ 개념은 김상봉의 통찰을 참조한다. 그리고 최근 박동환이 내놓은 ‘파격’ 및 ‘격파’라는 개념을 통해, 멜랑콜리의 서양적 한계를 돌파하는 미래의 멜랑콜리를 구상해본다.

제3부 멜랑콜리의 수용과 변용
9장 「현대시의 멜랑콜리 ― 기형도」는 현대시의 멜랑콜리를 분석한다. 기형도 시를 중심으로 현대시에 멜랑콜리 담론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또 현대시의 주요 아포리아가 어떤 점에서 멜랑콜리와 연결되는지 고찰한다. 특히 현대적 허무주의와 멜랑콜리 담론의 교차점, 그리고 기형도의 시 「빈집」을 한恨으로 해석하는 김상환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10장 「기룸과 멜랑콜리 ― 한용운」은 만해 한용운의 시와 하이데거 철학에 스며 있는 근본 정조의 차이점을 밝힌다. 만해와 하이데거는 의외로 근친 관계에 놓여 있다. 만해의 ‘사랑’은 하이데거의 ‘존재’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만해 시의 근본 정조가 ‘기룸’이라면, 하이데거 철학의 근본 정조는 ‘멜랑콜리’다. 이 차이는 만해의 사랑이 타자중심적인 반면, 하이데거의 존재는 자기중심적이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기룸(‘사랑’, ‘기다림’의 의미를 함축한 시어)은 깊은 슬픔에 물든 그리움과 기다림을 내장하고 있지만, 만해의 사랑에는 처음부터 님과의 거리와 부재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기에 그 슬픔은 자기중심적 나르시시즘의 자기상실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라 철저히 타자중심적 사랑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차라리 자기와 타자의 ‘사이’, 그 ‘사이의 사랑’이다.
11장 「멜랑콜리 감성의 정치적 힘 ― 김수영·진은영」은 예술의 정치성, 혹은 미학적 감성의 정치적 의미를 다루는 진은영과 크리스토프 멘케의 논의를 멜랑콜리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를 통해 멜랑콜리 감성의 정치적 함의를 살펴보며, 특히 진은영의 시 「멜랑콜리아」에 담긴 알레고리를 분석함으로써 멜랑콜리의 변용 범위를 타진해본다.
12장 「슬픔의 기울기 ― 이성복」은 누구보다도 멜랑콜리한 시적 정조를 구축했던 이성복 시인의 최근 시들 속에서 이전의 서양적 멜랑콜리와는 품격을 달리하는 오래 숙성된 멜랑콜리를 읽어낸다. 서양문화의 핵심인 멜랑콜리를 거대한 시적 감수성으로 용해하는 그 감성적 변용 속에서 미래 철학의 가능성을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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