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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들>- 구멍

by 책이랑 2020. 12. 10.

 

1. 

길어야 정상인데 너무 짧은 피, 짧아야 정상인데 너무 긴 뼈, 마치 나무좀이 파먹은 나무껍질 같은, 결절이 생긴 뼈, 빅토리아 양식의 진열장 조명 아래 놓인 가여운 인간의 두개골들은 활짝 웃으며 돌출된 치아를 드러내고 있는데, 예를 들어 이마 한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있는 두개골은 치 아가 매우 아름다웠다. 이 구명이 결정적인 사인이었는지 는 의문이다. 아니었을 수도 있다. 오래전 철로 공사를 담 당하는 한 기술자의 머리를 금속봉이 관통했는데, 그러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더 살았다고 하니 '인간은 자신의 뇌에 의해 존재한다'라는 신경 심리학의 가설에 더할 나위 없어 유용한 사레임이 틀림없다. 그는 죽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변했다. 흔히 말하듯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의 뇌에 달려 있으니, 이제 왼편에 있 는 뇌 전시장으로 가 보자. 자, 여기 뇌들이 있다! 특별한 용액에 잠겨 있는 크림 빛깔의 말미잘, 큰 것과 작은 것, 천재적인 것, 그리고 둘도 못 젤 정도로 바보스러운 것.

 

- 라 마노 조반니  바티스타

 

2. 

우리 주변에는 세상이 너무 많다. 그러므로 세상을 확장 하거나 늘리기보다는 줄일 필요가 있다. 조그만 상자, 이를 테면 휴대용 파놉티콘에 세상을 쑤셔 넣고 모든 일과를 마 친 토요일 오후에만 들여다볼 수 있게 했으면 싶기도 하다. 속옷 빨래를 다 해 놓고, 셔츠는 의자 등받이에 널어 주름 을 펴고 마룻바닥도 깨끗이 걸레질하고 크럼블 케이크는 모양이 잡히도록 창틀에 올려 잘 식힌 뒤에 말이다. 그러고 나서 마치 바르샤바에 있는 포토플라스티콘을 관람하듯 구멍을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선택하는 법을 익히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야간열차에서 만난 여행객처럼 말이다. 그는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림을 보기 위해 얼마간 한 번씩은 반드시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한다고 했다. 「세례자 성 요한 앞에 서서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요한의 손끝 바라보기 위해서,

-보는 만큼 안다.

 

3. 

모형 60 역시 근육과 힘줄을 보여 준다. 하지만 무엇보 다 무리의 이목을 끄는 것은 완벽한 비율을 과시하며 부드 러운 곡선으로 매듭지어진 창자다. 매끈한 표면 위로 박물관 창문이 비친다. 잠시 후 나는 이 모델이 여자라는 사실 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몸에는 괴상한 것이 덧붙었 는데 배 아래쪽에 회색빛 털뭉치가 붙었고, 그 안쪽에 직사 각형 모양의 작고 조잡한 구명이 뚫려 있었다. 아마도 이 모델의 작가는 해부학에 대해 무지한 관람객들에게 이것이 여자의 창자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털북숭이 낙인, 여성의 로고, 성별 마크 모형 60은 창자의 후광처럼 순환계와 림프계를 드러내 보인다. 대부분의 혈관은 근육 에 의지하지만 일부는 과감하게 격자무늬 형태로 허공에 매달려 있다. 비로소 이 붉은 실들이 만들어 내는 놀라운 프랙털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속해서 팔과 다리, 위장, 심장이 전시되어 있다

-밀랍인형 컬렉션

 

 

4.

비행 세 시간, 내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화장실에 갔 다가 좌석으로 돌아왔다. 그를 창가 자리로 들여보내기 위 해 좌석에서 일어서면서 나는 그와 의례적인 넷 마디를 주 고받았다. 날씨와 난류, 그리고 음식에 대해서, 비행 네 시 간째에 접어들자 마침내 우리는 서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 는 물리학자였다. 특강 및 건을 마치고 귀가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가 구두를 벗었을 때 나는 그의 양말 뒤꿈치에 거 다란 구멍 하나가 난 것을 발견했다. 이런 식으로 물리학자 의 물리적인 육체는 내 눈길을 끌었고, 그때부터 우리는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는 고래에 대 해 상당히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따로 있었다.
암흑 물질, 그가 연구하는 대상은 바로 그것이었다. 누구나 존재는 알고 있지만, 어떤 도구로도 포착되지 않는 미 지의 대상, 하지만 복잡한 계산과 수학적 결과는 그 존재의 증거를 명백히 드러낸다. 모든 정표가 가리키는 것은 이러 한 물질이 우주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 리가 잘 아는 물질, 우리의 우주를 구성하는 명확한 물질들 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제로는 훨씬 적다. 반면에 암흑 물질 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지금 여기, 바로 우리 주변에도 존재 한다고, 구멍 난 양말을 신은 사내가 말했다. 그가 창밖을 내다보며 우리 밑에서 흘러가고 있는 눈부시게 밝은 구름 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 저기 바깥에도 있어요. 사방에 존재하죠. 고약한 건, 그게 대체 뭔지, 그리고 왜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
다.”

 

- 암흑물질

 

 

5.

쿠니츠키의 뒤에서 여름이 꽝 하고 문을 달아 버렸다. 쿠니츠키는 샌들을 슬리퍼로 갈아 신고, 반바지를 긴바지로 갈아입고, 책상에 앉아 연필을 깎고, 영수증을 정리하면, 서 그렇게 정착하는 중이다. 과거는 그저 생의 파편이 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후회할 필요는 없다. 그가 지금 느끼는 건 일종의 환지등기)이고 비현 실적인 것이며 온전한 전체를 갈망하는 모든 불완전하고 들쭉날쭉한 형태가 겪는 대생적인 고통이다.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최근 들어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저 녁 무렵 깜빡 잠이 들었다. 피로에 지쳐 쓰러져 버리는 것 이다. 하지만 새벽 3~4시경이면 어김없이 했다. 몇 년 전 홍수를 겪고 난 뒤에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때는 불면증 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다. 직접 재해를 겪고 나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어떤 재난이나 재해도 없었다. 그런데 어떤 구멍이나 공백 같은 것이 생겨 버렸다. 니츠키는 적철한 말을 통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에게 벌어 진 일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적절하고 의미 있는 적정 치의 어휘들을 찾는다면 구멍은 흔적 없이 메워지고, 아침 8시까지 푹 잘 수 있으리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어쩌다 머릿속에서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 한두 개의 단어가 울려 퍼 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불면의 밤과 광란의 낮으로부 터 동시에 추출된 단어들. 신경 세포에서 뭔가가 번쩍거리 고, 알 수 없는 충동이 이쪽저쪽으로 뛰어올랐다. 생각이란 본래 이렇게 발생하는 게 아니던가.

그것들은 이미 이성의 문 앞에 선 준비된 환영이며, 공 장에서 대량 생산된 것이었다. 실제로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 쿠니츠키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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